Archive for the ‘책과 영화’ Category

시지프 신화

Friday, December 26th, 2008

시지프의 신화에 있어서는 다만 거대한 돌을 들어올려 산비탈로굴려 올리기를 수백 번이나 되풀이하느라고 잔뜩 긴장해 있는 육체의 노력이 보일 뿐이다. 경련하는 얼굴, 바위에 밀착한 뺨, 진흙에 덮인 돌덩어리를 떠받치는 어깨와 그것을 고여 버티는 한쪽 다리, 돌을 되받아 안은 팔끝, 흙투성이가 된 두 손 등 온통 인간적인 확신이 보인다. 하늘 없는 공간과 깊이 없는 시간으로나 헤아릴 수 있는 이 기나긴 노력 끝에 목표는 달성된다. 그때 시지프는 돌이 순식간에 저 아래 세계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그 아래로부터 정점을 향해 이제 다시 돌을 끌어올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또다시 들판으로 내려간다.

바로 저 정상에서 되돌아 내려오는 걸음, 잠시 동안의 휴식 때문에 특히 시지프는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그토록이나 돌덩이에 바싹 닿은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은 이미 그 자체가 돌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내쉬는 숨과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은 곧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하여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성공의 희망이 그를 떠받쳐준다면 무엇 때문에 그가 고통스러워하겠는가? (이하 생략)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책이 먼가 간지는 나는것 같은데 좀 어려운듯... 무식해서리... 암튼 고통스러울때, 씨익~ 웃으며 다시 돌아가라는 메세지가 맞는거임?

플랫랜드 (Flatland: A Romance of Many Dimensions)

Saturday, October 11th, 2008

Edwin A. Abbott 의 Flatland: A Romance of Many Dimensions 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찾아보니, 번역본도 나와있네요. 플랫랜드 이야기.

알라딘의 책설명은 이렇게 되어 있네요.

재치와 풍자가 가득한 <이상한 나라의 사각형>(원제: 플랫랜드)은 1884년 애벗이 A. 스퀘어라는 필명으로 출간한 것으로 이후 공상 과학 문학의 독보적 위치를 차지해왔다. 신선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은 이 책은 2차원 세계의 기하 개념을 다룬 독특한 작품인 동시에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당시 계급 제도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 풍자 문학이기도 하다.

사실 저는 책은 안 읽어봤고, 2007년에 나온 DVD 애니메이션으로 대충 봤었는데, 신랄한 풍자는 잘 몰랐었는데 다시 한번 봐야겠네요. 공식 홈페이지는 http://www.flatlandthemovie.com/

플랫랜드에 살던 사각형씨가 3차원에서 온 구에 의해 플랫랜드에서 꺼내지는 장면입니다. 3분가량인데요. 저는 이 장면 마지막 자락에 거의 울뻔했다는...

어서 한글판도 나오면 좋겠네요. 자라나는 조카들에게 선물하여 이공계적 감수성을 길러주면 좋겠다는...

건국의 정치 - 김영수 (2) : 노트

Friday, October 10th, 2008

요약 정리할 능력이 없어서, 그냥 오려붙여 둔다.

여말선초의 이야기지만, 이 시대가 요청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본다.

역사에는 평화롭지만 평범한 시대가 있고, 어렵지만 창조적인 시대가 있다.(17p)

 충숙왕 2년 이래 공민왕 대에 이르기까지 제과에 합격하여 원의 관리로서 재직했던 자는 안진, 최해, 안축, 이곡, 이인복, 조염, 안보, 윤안지, 이색, 빈우광 등 10인에 이른다. 고 려 유학은 중국과 비슷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당대 고려의 지식계는 중국과의 문화 교류에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지적 세계를 고려에 한정시키지 않고, 중국으로까지 확대하여 사고하고 있었다. 중국 문화권의 변방에 속했던 고려는 보다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문화권의 일원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여말선초의 문화적, 정신적 활력의 분출은 이러한 조건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제1세대가 성리학을 수용하고 전파했다면, 제2세대는 성리학의 학문적, 정치적 전환을 비로소 이해하고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했으며, 제3세대는 그 문명적인 의미로까지 이해를 성숙시켜 정치 운동화했다.(???p)

그 러므로 신돈의 개혁 정치는 한 정치가의 개인적인 도덕성과 개혁 의지가 아무리 훌륭하다해도, 심도 있는 현실 이해가 결여되어 있고 그 개혁을 수행할 정치집단을 구비하고 있지 못할 경우, 그 정치가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가에 대한 하나의 역사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276p)

고려는 훌륭한 정치제도와 관습을 가지고 있긴 하였으나 "말의 소통"을 정치체제의 핵심적 문제로 다루지는 않았다. 정도전은 조선의 정치 규범을 제시한 '경제문감'에서 "천하가 모두 간쟁하는 것"을 이상적인 정치로 보고 있다. 조선 정치에서는 "공론은 천하 국가의 원기"와 같다고 생각했다. (329p)

14세기말 한국에서 정신적 영역과 정치체제 전체를 성리학과 같이 세속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사유로 재편성하려는 노력은 비상했다. 그것은 인간이 그 자신의 힘과 이해에 의해 자신의 삶을 정복하려는 노력이며, 인간의 주체성을 오로지 자신의 이성과 양심에만 근거 지우려는 프로메테우스적인 것이었다. 그를 통해 다음 시대를 이끌고 갈 이념이 개화했다. (376p)

이처럼 '부곡으로 추방된 성리학'은 주자조차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다. 중국의 성리학은 관학이나 개인의 수양학으로 계속 살아남았지만, 혁명적이념으로는 한번도 발전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성리학은 이 급진적 성리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조선은 바로 그런 절대적 한계 상황에 직면했던 성리학의 응답에서 탄생되었다. 실제로 조선 건국에 참여했던 성리학자는 극소수였다. 조선 건국의 지도자였던 이색과 정몽주는 오히려 고려 수호파의 지도자였으며, 정도전과 윤소종만이 적극적인 참여자였다. 이처럼 조선 건국까지 나아간 성리학은 성리학의 전통에서도 수용하기 힘든 것이었다.
유배기의 체험은 정도전이 이색의 문하를 떠나 고려왕조의 정치적 정통성을 부정하게 되는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반성의 대상은 바로 관습적인 정신의 지평에 머물러 있었던 과거의 자신이었다. 백성들과 생활하면서 그는 관습적인 정신세계로부터 벗어나 시대의 고통을 자신의 역사적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고려 말의 성리학 운동은 혁명운동과 결합되었다.(533p)

이 시대의 개혁을 포괄하는 전체적인 이념은 '공공성'이었다.
이 시대의 개혁은 전면적이고 철저했으며 유기적으로 시행되었다. 첫째, 이 개혁은 대증요법이 아니라 새로운 원리에 의해 기존의 제도를 완전히 재편성하려고 했다. 둘째, 이러한 여러 개혁들은 단절적으로 계획되지 않고 유기적인 연광성을 가지고 계획되었다. 전제 개혁과 관제 개혁, 지방행정 개혁, 군정 개혁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추진되었다. 그것은 개혁자들이 이런 여러 제도들 사이의 관계를 통일적인 패러다임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582p)

조선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절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왕과 세자에게는 경연과 서연을, 중앙에는 성균관과 사학, 지방에는 향교를 설치하여 사대부와 서민의 자제를 교육시켰다. 이것을 차례로 살펴보자.
첫째, 조선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교육 대상은 왕이었다. 이상적으로 볼때, 왕은 교육자 중의 교육자가 되어야 한다. 성리학의 정치 이론에 의하면 왕은 군사로서 하늘을 대신한 교화자이기 때문이다. 왕의 건전한 교육은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였다.
(...)
둘째, 정치 공동체는 단지 왕 한 사람뿐만 아니라 전체 구성원의 문명화를 통해서만 평화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국적으로 확대된 학교에는 문묘를 함께 설치하게 함으로써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닌 진정한 인격의 완성이 목표임을 알리고 있다.(776~779p)

이는 한반도인들이 오랜 정치적 경험과 성찰을 통해 정치 공동체와 정치적 삶 일반을 보편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새로운 정치적 인간으로 탄생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조선의 국가 건설 사상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정신적 삶의 현세화, 둘째, 정치적 삶의 윤리화, 셋째, 폭정을 방지하기 위한 권력 균형이다. (800p)

영웅숭배론 - 루소의 이야기

Sunday, October 5th, 2008

영웅숭배론이라는 책에서 루소의 이야기는 사실 그다지 비중있는 것이 못됩니다.(영웅숭배론 - 토마스 칼라일 포스팅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을 당시 저는 이 루소의 이야기가 참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세상의 찬사를 받고 싶었지만, 찬사는 커녕 세상의 비웃음의 환영과 싸워야 했던 루소의 그 우울하고 찡그린 얼굴이 마치 눈앞에 보이는 듯 했지요. 최진실 누님의 자살 이야기를 듣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저에게 전에 읽었던 이 루소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
(영웅숭배론, 288-292p)


광기 속에 피어난 진실의 불꽃 - 루소

루소와 그의 영웅정신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많지 않습니다. 그는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병적이고 쉽게 흥분하고 발작적인 사람입니다. 강건하기보다 오히려 격렬한 사람입니다. 그는 지극히 귀중한 자질인 '침묵'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인 중에는 이런 자질을 별로 가진 사람이 거의 없으며, 또 오늘날에는 어떤 부류의 사람도 이런 자질을 별로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고생하는 사람은 마땅히 "자기 자신의 연기를 마셔 없애야 합니다." 모락모락 '연기'를 내뿜어보았자 그것이 '발화' -물론 비유적인 의미에서 모든 연기는 불이 될 수 있습니다- 될때까지는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루소는 진정한 위대성의 특질인 깊이와 넓이, 그리고 곤란에 부딪혔을 때의 침착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격렬하고 엄격한 것을 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근본적인 착오입니다.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은 여섯 사람이 달라붙어도 억제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보고 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도 비틀거리지 않는 사람만이 강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항상, 특히 목소리만 높이는 시대에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말하고 행동할 때가 오기까지 '조용히 침묵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가엾은 루소의 얼굴은 그의 사람됨을 잘 보여줍니다. 고상하긴 하나 편협하고 위축된 격렬성을 보여줍니다. 앙상한 이마, 깊고 작은 눈, 그 눈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담겨 있습니다. 당황하여 스라소니처럼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불행 - 그것도 저열한 불행 - 과 그에 대한 반항이 가득합니다. 그의 표정에는 천하고 평민적인 무엇이 있는데, 그것은 그나마 그의 '격렬성'덕분에 완화되었습니다. 그것은 '광신자'의 얼굴입니다. 그는 슬프게도 위축된 영웅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에게는 많은 결점이 있는데도 영웅의 첫째 조건에 해당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정녕 '진지'합니다. 어떤 사람에 못지않게, 프랑스의 어떤 철학자보다도 더 진지합니다. 그는 다감하고 유약한 성격에 비해서 아주 많이 진지합니다. 사실 그것이 결국에는 그를 광기에 가까운 기이한 자아모순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광적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사상은 마귀처럼 그를 사로잡았으며, 그를 내몰아 가파른 낭떠러지로 달리게 했습니다.

루소의 결함과 불행은 한마디로 쉽게 줄여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기심'이었습니다. 이기심은 실로 모든 잘못과 불행의 원천이며 핵심입니다. 그는 단순한 욕망을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여러 종류의 굶주린 욕망이 그의 강력한 동기였습니다. 그는 또 사람들의 찬사를 구하는, 허세가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장리스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입니다. 이 부인은 장-자크를 극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장-자크는 절대로 자기가 누구인지 알리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그이는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은 굉장히 싫어했어요." 그런데 그만 그가 앉은 좌석의 커튼이 열리는 바람에 관객들은 장-자크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다지 크게 주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몹시 화를 냈습니다. 저녁 내내 불쾌해하며 퉁명스러운 말만 했습니다. 같이 간 백작부인은 장-자크가 화를 낸 것은 사람들의 눈에 띄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보고도 갈채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의 성격은 완전히 비틀려져서 의심과 자기고립과 심한 우울증만이 남았습니다! 그는 누구하고도 어울려 살 수 없었습니다. 시골 출신으로 지위가 상당한 사람이 종종 찾아와서 그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곤 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장-자크를 찾아와보니 장-자크는 까닭없이 심기가 몹시 불편한 상태였습니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장-자크는 말했습니다.

이봐요, 당신이 왜 날 찾아오는지 나는 알고 있소. 내가 얼마나 초라하게 살고 있는지를 보려고 왔겠지. 자, 그 속을 보여드리지! 고기 반 파운드, 당근 하나, 양파 셋, 그뿐이오. 자, 가서 온 세상에 알려주시구려!

이쯤 되면 지나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온 세상은 가련한 장-자크의 이러한 심술궂고 위축된 성질에서 연극적인 웃음거리를 즐겼습니다. 그러나 장-자크는 사람들이 가볍게 웃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죽어가는 검투사의 일그러진 모습입니다. 관람석을 메운 사람들은 재미있게 구경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검투사는 단말마적인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루소는 모성에 대한 정열적인 호소를 통해, '사회계약론'을 저술함으로써, 그리고 자연을 -심지어 자연 속의 야만생활까지도- 찬양함으로써, 진실에 접근했고 진실을 추구하며 싸웠습니다. 그는 자기 시대에 대해 예언자의 본분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로서, 그 시대로서 할 수 있는 한 그 일을 했습니다!

기이한 것은, 그 모든 위축·타락·광증속에서도 가련한 루소의 가슴 깊은 곳에는 진정 천국적인 불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시들어빠진 조소적인 철학, 회의주의, 농지거리의 시대에도, 이 사람의 심정에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진실'한 것으로 떠올랐습니다. 회의주의, 논리적 명제, 농지거리가 아니라, 하나의 사실이며 하나의 두려운 실재라고 하는 느낌과 지식이 솟아났습니다. 자연은 이 계시를 그에게 주고, 선언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선언했습니다. 훌륭하고 분명하게 하지 못하고 서툴고 모호하게 했을망정, 그가 할 수 있는 한 분명하게 선언했습니다.

우리의 그의 모든 잘못과 단점, 리본을 훔친 사건, 목적의식도 없이 혼란스럽기만 했던 그의 불행과 유랑마저도 호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힘에 겨운 임무를 맡은 사람, 아직 찾아내지도 못한 실로 심부름을 가는 사람이 어리둥절하며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항상 사람을 너그럽게 대해주며 그 사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말고 기다려보아야 합니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도록 두고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나 살아 있는 동안은 희망이 있습니다.

루소의 문학적 소질은 그의 나라 사람들 간에는 아직까지도 대단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것에 대해서 나는 할 말이 많지 않습니다. 그의 책은 루소 자신과 같아서 건강하지 않습니다. 좋은 종류의 책이 아닙니다. 루소에게는 일종의 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지성과 결합되었을 때 그려지는 그림은 찬란한 매력을 지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수한 시적인 것은 아닙니다. 투명한 햇빛이 아니라 오페라풍의, 마치 장미의 분홍빛 같은 야한 치장입니다. 그것은 그의 시대 이후 프랑스인들의 저술에 종종 나타납니다.

아니, 보편적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스탈 부인에게도 더러 있고, 생 피에르, 그리고 오늘날의 '절망의 문학'에 이르기까지 어디에나 널려 있습니다.

이 '장미의 분홍빛'은 올바른 경향이 아닙니다. 셰익스피어, 괴테, 그리고 하다못해 월터 스콧을 보십시오! 이들을 본 사람은 진리와 거짓의 차이를 본 것이며, 한번 그차이를 보면 영원히 구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존슨에게서 온갖 불행과 위축 속에서도 예언자가 세상을 위해 얼마나 많은 좋은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루소에게서는 불리한 조건 속에서 얼마나 많은 악이 선에 수반되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루소는 지극히 많은 결실을 초래했습니다. 그는 파리의 다락방 속으로 추방되어 자신의 사색과 궁핍에 묻혀 살았습니다. 이리저리 내몰리며 그는 광기에 빠질 정도로 고민하고 분노했습니다. 그는 점차 세상이나 세상의 법이 자기의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사무치게 느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런 사람은 세상에 적대 관계에 서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입니다. 세상은 그를 다락방 속에 가두어 미친 사람 취급하며 조소하면서, 들짐승처럼 그 안에서 굶도록 방임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 불을 지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루소는 프랑스혁명의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문명생활의 불행에 대한 거의 광적인 사색, 야만상태가 문명생활보다 낫다는 사상 등은 온 프랑스를 열광의 도가니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세상은, 또는 세상의 지배자들은 이런 사람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세상의 지배자들이 이런 사람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는 실로 대답하기가 곤란합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이런 사람이 세상의 지배자들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 우리로서는 더 알기가 쉽습니다. 실로 간단합니다. 즉 많은 지배자들이 '길로틴'으로 처형당했던 것입니다. 루소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

등장하는 일화들은 루소를 거의 '이뭐병' 수준으로 보이게 합니다. 하지만 그 슬픔과 우울과 찡그린 얼굴에도 불구하고, 그가 기꺼이 맞선 그 끈끈하고 진실된 삶이 전해주는 감동이 있습니다.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되지
그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되고 산이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그리고 이 노랫말처럼 루소는 결국 메아리가 되어 사람들의 곁에 언제까지나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영웅숭배론 - 토마스 칼라일

Friday, June 27th, 2008

인도와도 바꾸지 않을 셰익스피어. 이 말은 어디에서 왔는가? 바로 이 책, 토마스 칼라일의 영웅숭배론(On Heroes, Hero-Worship and the Heroic in HIstory)이다.

만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 잉글랜드인을 보고 인도와 셰익스피어 둘 중 어느 것을 포기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인도를 전혀 갖지 못한 경우와 셰익스피어 같은 인물을 전혀 갖지 못한 경우 둘 줄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은 정말 쉽지 않은 물음입니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의심할 나위 없이 공식적인 말로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도야 있든 없든 상관없으나, 셰익스피어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입니다!

어쨌든 인도 제국은 언젠가는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

한 민족이 그 자신을 표현할 소리를 얻는다는 것, 그의 가슴이 말하려는 것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해주는 인물을 갖는다는 것은 실로 위대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경우, 저 불쌍한 이탈리아는 지금 분열되고 분리되어, 어떤 대외관계에도 하나의 통일국가로서 나서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 고귀한 이탈리아는 사실 '하나'입니다. 이탈리아는 단테를 낳았습니다. 이탈리아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 전역을 지배하는 황제, 그는 강합니다. 많은 총검, 카자크 병사, 대포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큰 땅덩어리를 정치적으로 결속하는 어려운 일을 능히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아직 말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위대한 무엇을 가지고는 있으나, 아직 벙어리 상태입니다. 그는 모든 인간과 시대에 들릴 만한 천재의 소리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러시아는 말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는 아직까지는 거대한 벙어리 괴물입니다. 그의 대포도, 카자크 병사도 모두 녹슬도 없어질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단테의 음성은 아직도 들려옵니다. 단테 같은 인물이 있는 이탈리아는 아직 벙어리 상태인 러시아가 흉내 내지 못할 정도로 결속되어 있습니다. (189-191p)

침착함과 차분한 말로 사람의 뇌에 충격을 가하는 책이 있다면, 열정적이면서도 격정적인 말로써 사람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책이 있다고 할까? 그렇다면 이 책은 바로 후자에 해당한다. 곳곳마다 명언과 명구가 넘쳐나고 있는데, 이 책을 가지고 어휘 빈도 분석을 한다면, 아마도 다음의 단어들이 영웅의 자질을 묘사하는 말들 중 상위에 오를 것이다.

거친, 참된, 깊은,

단순, 간결, 소박,

솔직, 진실, 성실,

순수, 진지, 용기

책을 읽지 않고는 참맛을 느끼기가 어려운데, 맛배기로 조금만 보여줄까 한다.

다음은 '시인으로 나타난 영웅' 에서 단테의 이야기를 하던 중.

그것은 근본적으로 모든 시 중에서도 '가장 성실한'것입니다. 성실은 이곳에서도 가치의 척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시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세대를 통해 깊숙이 우리들의 가슴속으로 스며듭니다. 베로나의 시민들은 그와 거리에서 만날 때 다음과 같은 말을 예사로 하였습니다. "보라, 저기 지옥에 다녀온 사람이 있다!" 아, 과연 그러했습니다. 그는 지옥에 다녀왔습니다. 오랜 세월 엄혹한 비애와 고투의 지옥 속에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인물은 모두 그러했습니다. 그의 신성한 코미디는 다른 방도로는 완성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상이나, 어떤 종류이든 진실한 노작, 또는 최고의 덕, 이런 것들은 모두 고통의 산물이 아닙니까? 말하자면 암흑의 회오리바람에서 탄생한, 자유를 얻으려고 몸부림치는 포로의 노력과 같은 참된 노력, 그것이 바로 사상입니다. 모든 의미에서 우리는 '고난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160p)

다음은 '성직자로 나타난 영웅' 장에서 루터의 이야기를 시작하며 하는 이야기.

영웅숭배? 아, 사람이 자립적이고 독창적이고 진실하면서 다른 사람의 진실성을 존경하고 믿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다른 사람의 죽은 형식, 와전, 허위를 믿지 않게끔 필연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강제할 뿐입니다. 사람은 그의 열린 눈으로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의 눈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

사람이 자기에게 진실을 가르쳐주신 이를 사랑하기 전에 어찌 눈을 감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만이 그를 암흑 속에서 광명 속으로 구해주신 영웅적 스승을 진정한 감사와 참된 충성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존경을 받아 마땅한 진정한 영웅이며, 악마의 정복자가 아닙니까? 검은 괴물,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유일한 적인 '거짓'은 그의 용기에 정복되어 쓰러져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세상을 정복해준 것은 그 사람입니다!

...

영웅숭배는 결코 사멸하지 않습니다. 사멸할 수 없습니다. 충성과 주권은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합니다. 그것들은 허식과 외관이 아니라, 실제와 성실 위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눈, 우리의 '개인적 판단'을 닫음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열고 무엇인가를 바라봄으로써 말입니다! 루터의 사명은 모든 거짓 교황과 거짓 왕을 타도하고, 새로운 진정한 교황과 진정한 왕에게 생명과 힘을 먼 곳에서나마 가져다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

성실치 않은 인간들을 가지고 공동체를 형성할 수는 없습니다. 수직과 수평을 맞추어 서로 직각이 되게 하지 않고서는 건축물을 세울 수 없습니다! 프로테스탄티즘 이래의 이 모든 험난한 혁명적 사업에서 나는 가장 충복된 결과가 예비되고 있음을 봅니다. 즉 영웅숭배의 근절이 아니라, 오히려 온통 영웅들로 가득 찬 세계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 준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영웅이 '성실한 사람'을 의미한다면, 우리 모두가 영웅이 되어서는 안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전적으로 성실한 세계, 신앙의 세계, 그러한 세계는 과거에 있었으며, 미래에도 있을 것입니다. 없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올바른 종류의 영웅숭배입니다. 모든 사람이 진실하고 선한 곳에서만 진실로 더 선한 인물이 제대로 숭배를 받습니다!... (211~212p)

책을 읽고 나니, 나도 나만의 영웅들을 뽑아서 오로지 찬사만으로 가득찬 책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치는데, 나는 이과라서...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