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버트런드 러셀’ Category

잡담

Friday, December 5th, 2008

때가 때이니만큼, 나도 앞으로 내 삶의 무대가 어디가 될 것인지, 나는 장차 어디에 살게 될 것인지,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대로 미국에 살다가 가족도 생기도 애도 키우며 (!!??) 눌러 살게 될지,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지, 아니면 아직은 알 수 없는 어떤 곳이 될지,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겠다. 사실 이렇게 틈틈이 정치에 관한 글을 쓰는 것도, 한국에 들어가 살고 싶은 마음이 맘한구석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모든 딴나라 박멸의 노력이 언제까지고 그저 허공에 주먹질을 하는 것 뿐이라면... ㅠ.ㅠ 한국에 살기 싫겠지. 이명박 대안이 박근혜라는 식이라면...ㄷㄷㄷ 과연 딴나라가 언젠가 박멸될까?

Crete님의 '블러디 매리 탄생 75주년과 이명박식 역사교육' 에서 이런 문장을 봤다.

전 꿈이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현재 평양에 건설 중인 평양 과학기술 대학교(http://www.pust.or.kr/)에서 북한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과학 기술만을 가르치게 될까요? 제가 경험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북한 밖의 다양한 가치관을 전달해 줄 기대에 부풀어 있습니다.

이제 좀 살게됐다고 잘난척하기 바쁜 대한민국이지만, 솔직히 좀 짜증난다. 내가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수많은 젊은 사람들이 패기도 없어 보이고, 오히려 가면 갈수록 그 생기를 잃어가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맘을 매우 불편하게 한다. 우스운 말이긴 하지만 저런 나라에서 누구와 함께 뭘 할 수 있을까? 뭐 이런 생각이 가끔 드는 것이다. 고소득 전문직 아니면 안정된 공기업 대기업 정규직을 향한 투쟁에서 밀려나게 되면, 험한 세상살이가 기다리고 있는 88만원 세대의 고충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지만, 나라의 미래는 매우 암울해 보인다.

위에 문장을 붙여 놓은 까닭은, 실은 나도 이런 생각 -북에서 가르치는 것- 을 해본적이 여러번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날이 올지 안올지는 모르는 것이고, 아직은 그냥 상상속에서나 해보는 일이다. 남한 사람들이 이담에 북한 사람들 깔보고 차별하고 할 것이 벌써부터 눈에 선하지만, 나는 북한만의 장점과 강점들이 꽤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북에서는 장차 좋은 학문적 업적들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근거없는 생각을 하곤 한다. 불을 붙이면 활활 타오를 젊은이들이 꽤 있을 것다는 생각을 하곤 하는 것이다. 전부 근거는 없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

한참 오래전에, 1930년 버트런드 러셀이 쓴 'On Youthful Cynicism' 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서양의 젊은이들이 왜 그렇게 냉소적이 되었을까 동양에서는 안 그런데 하면서 그에 대해 논하는 짧은 에세이다.

Any person who visits the Universities of the Western world is liable to be struck by the fact that the intelligent young of the present day are cynical to a far greater extent than was the case formerly. This is not true of Russia, India, China or Japan; I believe it is not the case in Czechoslovakia, Jugoslavia, and Poland, nor by any means universally in Germany, but it certainly is a notable characteristic of intelligent youth in England, France and the United States. To understand why youth is cynical in the West, we must also understand why it is not cynical in the East.

동유럽과 동양에서는 젊은이들이 각자의 나라를 만드느라 생기가 도는데, 유럽과 미국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결국 러셀이 내리는 그 원인에 대한 결론은 이것이다.

The main cause is always comfort without power.

그 옛날의 지식인들은 목이 잘리는 한이 있어도, 그 영향력을 잃지 않았음을 말하며, 그처럼 삶을 추동할 수 있는 강력한 비합리적 충동을 잃어버린 것을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젊은이들이 멍청한 세상과 쉽게 타협하는 지식인들이 되어버리고, 자신의 역할을 망각하고도 안락하게 살아가게 되는 세상에 있다는 것이다.

It is by no means difficult for him to obtain a fat job and a good income provided he is willing to sell his services to the stupid rich either as propagandist or as Court jester. The effect of mass production and elementary education is that stupidity is more firmly entrenched than at any other time since the rise of civilization. When the Czarist Government killed Lenin's brother, it did not turn Lenin into a cynic, since hatred inspired a lifelong activity in which he was finally successful. But in the more solid countries of the West there is seldom such potent cause for hatred, or such opportunity for spectacular revenge. The work of intellectuals is ordered and paid for by Governments or rich men, whose aims probably seem absurd, if not pernicious, to the intellectuals concerned. But a dash of cynicism enables them to adjust their consciences to the situation.

이런 게 이제 남얘기가 아닌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화시기를 지나고, 모든 과업을 이뤘다는듯, 그 생기를 잃어버리게 된 것일까. 나라꼴은 아직 개허접이라 갈 길이 멀어 보이는구만.

러셀이 마지막에 내놓는 대안은 이러하다.

If this diagnosis is right, modern cynicism cannot be cured merely by preaching, or by putting better ideals before the young than those that their pastors and masters fish out from the rusty armory of outworn superstitions. The cure will only come when intellectuals can find a career that embodies their creative impulses. I do not see any prescription except the old one advocated by Disraeli: `Educate our masters.'

대한민국은 앞으로 어디로 가려는가? 사람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을 새로운 꿈은 과연 어디서 나타날 것인가.

신념을 위해 죽는다?

Sunday, October 19th, 2008

I would never die for my beliefs because I might be wrong.

으아아아~ 신선하다. 이런 멋진 말은 처음 들어봐.

러셀은 영원한 나의 스승.

러셀의 타이틀이 다양해진 이유

Wednesday, June 11th, 2008

러셀이 누구인지 말할 때 등장하는 타이틀은 다양하다. 철학자, 수학자, 논리학자 등등등.

"When I was young I liked mathematics. When this became too difficult for me I took to philosophy and when philosophy became too difficult I took to politics."
(This is my philosophy)
내가 젊었을 때, 나는 수학을 좋아했다. 수학이 내게 너무 어려워졌을 때, 나는 철학으로 갔다. 그리고 철학이 너무 어려워졌을 때는 정치로 옮겨갔다.

배움과 앎의 종교

Monday, May 5th, 2008

유교 제일의 경전 논어. 그 첫 구절.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이 암흑 속 반지성의 시대에 들으니, 이 소박한 한마디가, 너무나도 신선하여 눈물이 찔끔 난다.

그리고 여기 또 배움과 앎의 종교를 가진 또 하나의 인간이 있다.

The good life is one inspired by love and guided by knowledge. Knowledge and love are both indefinitely extensible; therefore, however good a life may be, a better life can be imagined. Neither love without knowledge, nor knowledge without love produce a good life. In the Middle Ages, when pestilence appeared in a country, holy men advised the population to assemble in churches and pray for deliverance; the result was that the infection spread with extraordinary rapidity among th crowded masses of supplicants. This was an example of love without knowledge. The late war afforded an example of knowledge without love. In each case, the result was death on a large scale. (버틀란드 러셀 What I Believe, 1925 Chapter 2: The good life)

교육에 대한 몇가지 생각

Monday, January 14th, 2008

벌써 한참 전의 일인데, 대학에 입학했더니 자연대의 선배들이 만든 새내기를 위한 추천도서 목록 같은 것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불온서적 모음집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빨갱이들이 쓴 책, 감옥갔던 사람들이 쓴 책 거의 그런 것이었다. 그 중에 페다고지라는 책이 끼어 있었다.

파울로 프레이리, 페다고지 - 억눌린자를 위한 교육. 역시나 브라질의 체제 위협자로 감옥에 간 사람. 아무튼 그 때 처음으로 페다고지라는 말을 배웠다.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어보긴했는데, 제대로 읽지는 못하고 그냥 반납했던 것 같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단어 하나를 배웠다는 것이었다.

페다고지. pedagogy.

the function or work of a teacher; teaching.
the art or science of teaching; education; instructional methods.
the study and theory of the methods and principles of teaching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나는, 내가 교육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해간다. 나의 교육에 대한 생각, 페다고지를 짧게 적어보려 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내가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러셀의 말. (나의 예전 포스팅 :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기 자신과 친구들 또는 세계에 유익한 삶을 사는 이들은 희망에 의해 영감을 받으며 기쁨으로 살아간다. 그들은 가능한 사태를 상상해 보며 그것이 어떻게 실현될지를 생각한다. 사적인 관계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받았던 애정과 존경을 잃지 않기 위해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유롭게 애정과 존경을 줄 수 있으며, 굳이 구하지 않아도 그 대가는 그들에게 저절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일을 할 때도 그들은 경쟁자들의 질투에 휘말리지 않으며, 실제로 해야 할 실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정치적인 면에서, 그들은 그들 계급이나 국가의 부당한 특권을 옹호하는 데 시간과 정열을 낭비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세계 전체를 더 행복하고 덜 잔인하게 하며, 경쟁적 탐욕의 갈등이 줄어들게 하고, 억압에 의해 인간의 발전이 저해되거나 움츠러들지 않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교육을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삶의 자세를 말해준다. 러셀은 실제로 비컨힐이라고 하는 학교를 세워서 운영한 적이 있었다. 나도 나중에 할아버지되면, 이런거 하면서 청소년들 한번 똑똑하게 키워보고 싶은 소박한 꿈이 있는데(그렇다고 뭐 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던가 그런건 아니지만), 이게 요즘말로 하자면, 자사고라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지금처럼 대학교육 및 입시가 개판인 상황에서는, 절대로 국가가 청소년의 교육에 대한 통제를 놓아서는 안된다는 입장이기에 좀 문제가 있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좋은 애들 뽑아서 망치기만 잘하는 꼴통 대학들이 정신을 좀 차려줬으면 하는 맘뿐이다.

아무튼 짜증나는 인간들이 득실득실한 세상에서 남에게 자유롭게 애정과 존경을 준다는 게 말이 쉽지 실천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지만, 어쨌든 마음만은 이 말을 나의 주기도문으로 삼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유시민 의원이 학교근처에 강연을 하러 왔을때, 만나러 가서는 잡다한 말 다 때려치우고, 이 글을 적은 종이를 건네주었었다. 첨부터 끝까지 욕만 먹다가 쫓겨나가는 노무현 대통령을 볼 때마다, 나는 '애정과 존경을 잃지 않기 위해 미리 걱정하지 않는 사람'을 생각한다.

누군가 나에게 자유주의자를 위한 행동 강령 및 논리를 전개해 보라한다면, 이것을 가장 근본적인 원칙으로 삼겠다. 여기서 교육에 관련한 다음과 같은 생각을 덧붙인다.

바른 지식이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 삶의 질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며, 나의 지식을 공유하고, 다른 사람의 성장을 돕는다.

이러한 생각이 모든 교육현장에서 가장 우선으로 적용된다면, 그 어떤 백가지 교육개혁보다 혁명적일 것이다. 특히 한국의 대학들에게는 사회에 대한 책임이라는 가치를 좀더 주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생각이, 내가 이 블로그에 글을 쓸 때에도, 신변잡기가 아닌한은, 지식 한 조각, 지식 한 모금을 담아 보려는 마음을 갖도록 만든다.

수학의 교육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좀 더 구체적인 생각들은 앞으로 천천히 적어가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