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버트런드 러셀’ Category

우리가 살아야 할 삶에 대하여

Sunday, September 6th, 2009

이 글은 언제 다시 읽어도 가슴이 벅차고 또 부끄럽다.
단순히 글자들의 나열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의 삶을 말하는 것 같아서.
별이 되어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사람들에게선 예외없이 이런 성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세상엔 남에 대한 비난과 원망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자신이 굳이 지지 않아도 될 무게와 세상의 아픔까지 자기의 것으로 떠안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별 자신이 없지만 그래도 혹시나 나는 이 글을 당신께 드려봅니다.
영웅들로 가득찬 세상을 위하여.


In the daily lives of most men and women, fear plays a greater part than hope: they are more filled with the thought of the possessions that others may take from them, than of the joy that they might create in their own lives and in the lives with which they come in contact.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상에서는, 희망보다 두려움이 더 큰 역할을 한다. 그들은 자신의 삶과 그들이 접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그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쁨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로부터 빼앗아갈수 있는 소유에 대한 생각에 더 사로잡혀 있다.
It is not so that life should be lived.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삶의 방식이 아닐 것이다.
Those whose lives are fruitful to themselves, to their friends, or to the world are inspired by hope and sustained by joy:
자기 자신과 친구들 또는 세계에 유익한 삶을 사는 이들은 희망에 의해 영감을 받으며 기쁨으로 살아간다.
they see in imagination the things that might be and the way in which they are to be brought into existence.
그들은 가능한 것들을 상상하며,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에 대하여 생각한다.
In their private relations they are not pre-occupied with anxiety lest they should lose such affection and respect as they receive: they are engaged in giving affection and respect freely, and the reward comes of itself without their seeking.
사적인 관계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받았던 애정과 존경을 잃지 않기 위해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유롭게 애정과 존경을 줄 수 있으며, 굳이 구하지 않아도 그 대가는 그들에게 저절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In their work they are not haunted by jealousy of competitors, but concerned with the actual matter that has to be done.
일을 할 때도 그들은 경쟁자들의 질투에 휘말리지 않으며, 실제로 해야 할 실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In politics, they do not spend time and passion defending unjust privileges of their class or nation, but they aim at making the world as a whole happier, less cruel, less full of conflict between rival greeds, and more full of human beings whose growth has not been dwarfed and stunted by oppression.
정치적인 면에서, 그들은 그들 계급이나 국가의 부당한 특권을 옹호하는 데 시간과 정열을 낭비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세계 전체를 더 행복하고 덜 잔인하게 하며, 경쟁적 탐욕의 갈등이 줄어들게 하고, 억압에 의해 인간의 발전이 저해되거나 움츠러들지 않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A life lived in this spirit–the spirit that aims at creating rather than possessing–has a certain fundamental happiness, of which it cannot be wholly robbed by adverse circumstances.
소유보다 창조에 목적을 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에는 적대적인 상황조차도 완전히 빼앗아 갈 수 없는 어떤 근원적인 행복감이 있다.
This is the way of life recommended in the Gospels, and by all the great teachers of the world.
이것이 복음, 그리고 세계의 모든 위대한 선각자들이 설파한 삶의 방식이었다.
Those who have found it are freed from the tyranny of fear, since what they value most in their lives is not at the mercy of outside power.
이것을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삶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이 자신의 외부에 있는 힘이 베푸는 자비에 달린 것이 아니기에, 그들은 두려움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If all men could summon up the courage and the vision to live in this way in spite of obstacles and discouragement,
만약에 모든 사람들이 장애물과 낙담 속에서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상상력을 일으킬 수 있다면,
there would be no need for the regeneration of the world to begin by political and economic reform: all that is needed in the way of reform would come automatically, without resistance, owing to the moral regeneration of individuals.
개인들의 도덕적 각성으로 인하여, 세계의 변혁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저항없이 저절로 따라올 것이기에, 정치와 경제적 개혁에서부터 그 변혁을 시작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But the teaching of Christ has been nominally accepted by the world for many centuries, and yet those who follow it are still persecuted as they were before the time of Constantine.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많은 세월동안 말로만 받아들여져왔으며,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여전히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전 시대에서와 같이 박해를 받고 있다.
Experience has proved that few are able to see through the apparent evils of an outcast’s life to the inner joy that comes of faith and creative hope.
의지할 곳 없는 삶에서 마주한 불운 속에서도, 신념과 창조적인 희망에서 오는 내면의 기쁨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란 드물다는 것을 경험은 말해준다.
If the domination of fear is to be overcome, it is not enough, as regards the mass of men, to preach courage and indifference to misfortune: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두려움의 지배를 극복하기 위해 용기를 북돋아주고, 불행에 마음쓰지 말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it is necessary to remove the causes of fear, to make a good life no longer an unsuccessful one in a worldly sense, and to diminish the harm that can be inflicted upon those who are not wary in self- defense.
좋은 삶이 더 이상 세속적인 의미에서 성공적이지 못한 것이 아니도록 하고, 자신을 지키는데 조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질 수 있는 해악을 줄이기 위해서는, 두려움의 원인들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

버트런드 러셀, 자유로의 길
Roads To Freedom, By Bertrand Russell

권위주의사회의 용기와 시민사회의 용기

Wednesday, June 17th, 2009

용기

흔히들 용감한 군인이란 표현을 쓰지만, 용기라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이 잘못된 고정관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군인들이 만든 권위주의 사회의 용기도 이제는 시민이 갖춰야할 자질로서의 용기로 바꿔가야 할 것이다.

Courage in fighting is by no means the only form, not perhaps even the most important.
There is courage in facing poverty, courage in facing derision, courage in facing the hostility of one’s own herd.
In these, the bravest soliders are often lamentably deficient.
And above all, there is the courage to think calmly and rationally in the face of danger, and to control the impulse of panic fear or panic rage.
전장에서의 용기만이 결코 유일한 용기는 아닐 뿐더러, 아마 가장 중요한 용기도 아닐 것이다.
가난에 맞서는 것에도, 조롱에 맞서는 것에도, 동료들의 적대감에 맞서는 데도 용기는 있는 것이다.
가장 용감한 군인들은 때로 이러한 면에서의 용기가 개탄스러울만큼 부족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험에 맞서 차분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며, 밀려오는 공포와 분노의 충동을 통제할 줄 아는 것도 용기다.

버트런드 러셀, What I Believe, 36p, Science and Happiness 중에서

그 후 대통령으로 내린 판단 중 지지할 수 없는 결정들, 적지 않았으나 언제나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건, 그래서였다. 그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씩씩한 남자였다. 스스로에게 당당했고 같은 기준으로 세상을 상대했다. 난 그를 정치인이 아니라, 그렇게 한 사람의 남자로서,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래서 그의 투신을 받아들 수가 없었다. 가장 시답잖은 자들에게 가장 씩씩한 남자가 당하고 말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억울하건만, 투신이라니. 그게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아 종일 뉴스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담배 한 대를 찾았다는 대목에서 울컥 눈물이 났다. 그 씩씩한 남자가, 마지막 순간에 담배 한 대를 찾았단다. 에이 씨바... 왜 담배가 하필 그 순간에 없었어. 왜 하필. 담배도 없이, 경호원도 없이,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혼자가 되어, 그렇게 가버렸다. 그 씩씩한 남자를 그렇게 마지막 예도 갖춰주지 못하고 혼자 보내버렸다는 게, 그게 너무 속이 상해 자꾸 눈물이 났다.

[근조] 나는 그를 남자로 좋아했다, 딴지총수 김어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동료들의 적대감에 맞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씩씩한 남자. 세상에 용기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다.

스승님이 남긴 '자유주의자의 십계명'

Thursday, February 19th, 2009

A LIBERAL DECALOGUE by Bertrand Russell
자유주의자의 십계명 ― 버트런드 러셀

Perhaps the essence of the Liberal outlook could be summed up in a new decalogue, not intended to replace the old one but only to supplement it. The Ten Commandments that, as a teacher, I should wish to promulgate, might be set forth as follows

자유주의적 세계관의 정수는 새로운 십계명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인데, 이는 기존의 십계명을 대체하려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것을 보완하고자 할뿐이다. 교사로서 내가 전하고자 하는 십계명은 다음과 같이 규정할 수 있다:

1. Do not feel absolutely certain of anything.
1. 어떤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지 말라.

2. Do not think it worth while to proceed by concealing evidence, for the evidence is sure to come light.
2. 어떤 것을, 증거를 은폐하는 방법으로 처리해도 좋을 만큼 가치 있다고 생각지 말라. 그 증거는 반드시 백일하에 드러나니까.

3. Never try to discourage thinking for you are sure to succeed.
3. 필히 성공할 것으로 판단되는 생각을 절대로 단념하지 말라.

4. When you meet with opposition, even if it should be from your husband or your children, endeavour to overcome it by argument and not by authority, for a victory dependent upon authority is unreal and illusory.
4. 반대에 부딪힐 경우, 설사 반대자가 당신의 아내나 자식이라 하더라도, 권위가 아닌 논쟁을 통해 극복하도록 노력하라. 권위에 의존한 승리는 비실제적이고 허황된 것이기 때문이다.

5.Have no respect for the authority of others, for there are always contrary authorities to be found.
5. 다른 사람들의 권위를 존중하지 말라. 그 반대의 권위들이 항상 발견되기 마련이니까.

6. Do not use power to suppress opinions you think pernicious, for if you do the opinions will suppress you.
6. 유해하다고 생각되는 견해들을 억누르기 위해 권력을 이용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그 견해들이 당신을 억누를 것이다.

7. Do not fear to be eccentric in opinion, for every opinion now accepted was once eccentric.
7. 유별난 견해를 갖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인정받고 있는 모든 견해들도 한때는 유별나다는 취급을 받았으니까.

8. Find more pleasure in intelligent dissent than in passive agreement, for, if you value intelligent as you should, the former implies a deeper agreement than the latter.
8. 수동적인 동의보다는 똑똑한 반대에서 더 큰 기쁨을 찾아라. 현명한 지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태도이며, 그렇게 할 때 똑똑한 반대에는 수동적인 동의보다 더 깊은 의미의 동의가 함축되어 있다.

9. Be scrupulously truthful, even if the truth is inconvenient, for it is more inconvenient when you try to conceal it.
9. 비록 진실 때문에 불편할지라도 철저하게 진실을 추구하라. 그것을 숨기려다 보면 더 불편해진다.

10. Do not feel envious of the happiness of those who live in a fool’s paradise, for only a fool will think that it is happiness.
10. 바보의 낙원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을 부러워하지 말라. 오직 바보만이 그것을 행복으로 생각할 테니까.

Russell, Bertrand, Autobiography, New York: Routledge, 2000., pp. 553~554.
러셀 자서전, (하), 송은경 옮김, 서울: 사회평론, 2003., pp. 286~287.

어른들은 종종,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껄끄러운 것들을 숨기려고 한다. 나도 언젠가 나의 아이들을 키우게 된다면(글쎄...) 나는 보여주기 부끄러운 것들, 또는 흉해 보일 수 있는 것들을 단지 감추려고만 하지는 않고 싶다. 그러한 것들의 존재도 바로 이 사람들이 사는 세상의 진실인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잘 분별할 수 있고, 삐뚤어지지 않은 지혜로운 눈을 가질 수 있도록 하면 좋을것 같다.

비록 진실 때문에 불편할지라도 철저하게 진실을 추구하라. 그것을 숨기려다 보면 더 불편해진다.

원더걸스에게 말걸기

Sunday, January 4th, 2009

지난 달에 가디언의 'Sir Paul McCartney: I politicised the Beatles' 라는 재밌는 기사 하나를 보았다.

나는 비틀즈에 대해서는 유명한 노래들 외에는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대체로 비틀즈가 정치적인 메세지를 담은 노래를 하게 된데 있어서는 존 레논의 역할이 크다는 것이 주된 설이었나보다. 그런데 최근에 매카트니가 한 인터뷰를 통해서 이렇게 말했다 한다.

I politicised the Beatles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계기에 이러한 사연이 있었다고.

"Just when we were getting to be well known, someone said to me: 'Bertrand Russell is living not far from here in Chelsea, why don't you go and see him?'" McCartney said. Russell, then in his 90s, was a prominent philosopher and activist. "So I just took a taxi down there and knocked on the door."

"He was fabulous. He told me about the Vietnam war – most of us didn't know about it, it wasn't yet in the papers – and also that it was a very bad war."

That, McCartney explained, was enough. Filled with idealism, conviction and, er, a smattering of current events, "I remember going back to the studio either that evening or the next day and telling the guys, particularly John, about this meeting and saying what a bad war this was."

"We sort of stumbled into things," McCartney admitted.

비틀즈를 새롭게 만든 것이 존레논이였는지 매카트니였는지는 나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러셀이 가수와 만나서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 점이 바로 포인트다. 역시 스승님의 다양한 활동은 삶에 무한한 영감을 준다.

이점을 본받아 나도 원더걸스를 만나면 신문에서는 잘 말해주지는 않는 사실이지만 딴나라당이 얼마나 나쁜당인지 꼭 말해주고 싶은데, 안타까운 것은 원더걸스의 그 누구도 나를 찾아올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노래 가사를 써보내줘야할까.

악플에도 명랑한 사람들

Sunday, December 21st, 2008

좀 지나긴 했지만 엊그제 백분토론에 나왔던 진중권과 신해철의 악플에 대한 발언들이 참 재미있었다. ('촌철살인' 400회 100분토론 어록 총정리')

진중권 : 사실 인터넷서 가장 많이 욕먹는 사람이 나다. 온갖 욕설이 다 나오고 말도 안되는 얘기도 있는데 솔직히 저는 하나도 모욕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검찰이 내가 모욕감을 느끼고 저를 위해 고소를 해주는 게 말이 되겠느냐.

그리고

신해철 : 제가 느끼는 모욕감에 대해 보호를 요청한 적이 없다. 욕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는데 저는 이미 영생의 길에 도달하고 있는 상황이라 그다지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이들이 그저 보통 사람이라면 상처도 받고 의기소침할만도 할텐데, 이들은 악플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다. 그 정도를 넘어서 사실은 스트레스의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

사실 이들의 말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말들을 연상했다.

子曰 不患人之不己知오 患不知人也 (자왈 불환인지불기지 , 환부지인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탓하라."
(논어, 학이편)

그 다음,

In their private relations they are not pre-occupied with anxiety lest they should lose such affection and respect as they receive: they are engaged in giving affection and respect freely, and the reward comes of itself without their seeking.
사적인 관계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받았던 애정과 존경을 잃지 않기 위해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유롭게 애정과 존경을 줄 수 있으며, 굳이 구하지 않아도 그 대가는 그들에게 저절로 돌아오기 때문이다.(참고로, 그들 = 자기 자신과 친구들 또는 세계에 유익한 삶을 사는 이들)
(CHAPTER VIII. THE WORLD AS IT COULD BE MADE, Proposed Roads To Freedom Socialism, Anarchism and Syndicalism By Bertrand Russell)

하는 말이 얼마나 비슷한가? 바로 이러한 것들이 동서고금의 성인들이 전하는 대인배의 길이 아닐런지. 이렇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불행에 쉽게 빠지지 않는 것은, 언제나 자기자신이라고 하는 통제가능한 범위 안에서 더 나은 것을 향해 노력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을 원망하기 시작하면 답이 안 나온다. 아무튼 이것은 러셀과 공자를 동시에 등장시킨 두번째포스팅.

위의 패널들이 악플에도 명랑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대인배들을 일관하는 이 정신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