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인물연구’ Category

대통령도 별거 없나봐요

Saturday, May 22nd, 2010

남들몰래 꿍쳐둔 당신의 글을 읽습니다.

“오늘부터 미국에서 오는 비행기가 40분이나 더 걸린답니다.”
“왜 그렇게 된대요?”
“북한이 자기나라 동해 쪽으로 우리 비행기를 못 다니게 한 대요.”
“왜요?”
“당신한테 그거 물어보려고 말을 꺼냈는데, 저한테 물으면 어떻게 해요?”
한참 동안 밥만 부지런히 먹었다.
“북한을 나라라고 말하면 안 되는데….”
“그럼 뭐라고 하지요?”
“반국가 단체라고 해야 되나?”
또 한참 말이 없었다.
“북한이 왜 자꾸 저러지요?”
“커피 한 잔 주세요.”
커피를 마시면서 다시 시작한다.
“자기들은 중국하고 소련하고 같이 훈련 안하는데 우리는 미국하고 같이 훈련하니까 겁이 나서 그러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자기들을 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북한은 우리가 가만히 있는데도 치겠다고 하던가요?”
“북한은 믿을 수가 없잖아요?”
“북한은 미국이나 우리를 믿을 수 있을까요?”
여기까지만 하면 보통사람들의 수준이다. 나는 대통령이나 지난 사람이니 한마디 더 보탠다.
“세계 역사에서 힘이 약한 나라가 힘이 센 나라를 먼저 친 역사가 있던가요?”
“그래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지 않도록 해야겠지요.”
“그런데 북한이 좋은 말을 안 하잖아요.”
“그래서 우리도 똑 같이 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이대로 계속 가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09년 3월 금요일 아침 식탁에서 저와 아내가 주고받은 대화입니다. 아주 평범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평범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국제회의나 쌍방 외교 무대에서 국가적 지도자들 간에 북한 문제, 또는 안보전략을 놓고 나누는 대화의 수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대북 정책이나 안보전략이라고 하면 특별한 전문지식과 고급정보를 가지고 무슨 특별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저는 대통령을 하는 동안 대북 정책에 관하여 국내외의 많은 전문가들, 그리고 지도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경우에도 우리가 아침에 식탁에서 나눈 대화 그 이상의 특별한 수준으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명석하다고 알려진 지도자일수록 이런 식의 대화를 좋아하고, 스스로도 대화를 이런 수준으로 풀어나가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지나고 보면 이런 수준의 대화가 상황을 명료하게 이해하는 데 유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대북정책이나 안보문제에 특별한 전문지식이나 고급의 정보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군사력은 얼마나 되고 사람들이 먹고사는 형편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치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등등을 분석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일이나, 일상적으로 무슨 특이한 동향이 없는지 주시하고 판단하는 일은 전문가의 지식과 고급의 정보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판을 크게 보고 포괄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큰 줄기로 방향을 결정하는 일에는 전문가들의 특별한 지식과 정보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상식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세상 돌아가는 보편적 이치에 가장 가까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상식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해관계가 달라지면 철학도 달라지고 상식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전략 수준의 안보 정책은 사려 깊은 시민의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 두고두고 해주지 왜 그리 가셨어요.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이런 저런 안보관계 교육이나 보고에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남북 간 병력의 수, 항공기, 탱크, 기타 무기의 숫자를 단순 비교해놓고 우리의 군사력이 북한보다 훨씬 약하다는 도식적인 설명을 듣고는 좀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되고나서는 이전과는 좀 다른 보고를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국방부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를 받아보니, 여전히 이전에 들었던 것과 꼭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대통령을 바보 취급하는가 싶어서 불쾌한 느낌이 들기까지 했지만, 보고를 하는 사람들은 저의 그런 느낌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문제의식이 서로 달랐던 모양입니다.
저는 이런 경우를 미리 생각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라 무척 당황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런 경우에 대통령은 어떤 말을 해야 하는 것인지 잘 생각이 나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에 저는 아마 ‘남북 간 국방비 비교가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만일 실제로 전쟁이 일어났다고 가정하면 누가 이길 것 같으냐?’ 이런 정도의 질문만 하고는 대답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어물 쩡 넘어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다시 보고회의를 열어서, 실질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비교할 수 있는 분석 모델을 개발하여 분별이 있는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보고내용을 바꾸어 보라고, 그것도 몇 번이나 강력하게 지시를 한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이행이 잘 되지는 않았던 것 같고요.

유시민은 의료민영화를 추진했을까

Tuesday, November 24th, 2009

나는 본래 싸움닭 체질이 아니라서 논쟁에 가담하는 것을 즐기지는 않는데,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어 유시민장관 시절 의료민영화가 추진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이런저런 면들을 좀 알아보고 있다. 어쨌든 언제고 다시 불거질 문제이므로, 정리를 해볼 필요가 있겠다.

사실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당시 의료법개정안의 자구까지 따져볼 여력은 되지 않으나, 그래도 당시의 정책이 의료민영화라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적어도 나는 다음 핵심 쟁점들에 대한 점수를 한번 매겨봐야 한다고 본다.

국민건강보험의 당연지정제에 대한 정책
영리병원에 대한 정책
민영의료보험에 대한 정책

언제가 될지 기약은 할 수 없으나 나중에 자료조사가 대충 되고 나서, 글을 써볼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지금에도 거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세 가지 부분에 대한 입장으로 보건대, 유시민 당시 복지부 장관이 의료민영화를 추구했다는 주장을 입증하기는 상당히 무리가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관련글
건강보험 단상
의료민영화와 산업화 – 동의어와 관계어

2009년 5월 그의 '추가진술 준비'

Thursday, October 22nd, 2009

무언가가 잘못되어 그 원인들을 되짚을 때, 그 원인들을 둘로 나눠보곤 한다. 일이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었던 부분과 할 수 없었던 부분.
대부분의 어리석은 사람들이 쉽게 빠지는 함정이 '자신이 할 수 있었던 부분'을 간과하고 '자신이 할 수 없었던 부분'을 남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여기서 시작되는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이 바로 수많은 불행의 씨앗이 된다.
그런데 사실 무언가를 돌이켜보면 돌이켜볼수록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부분' 에도 어쩌면 내가 할 수 있었던 부분이 또 있었음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사람이 큰다는 것은 바로 그런 순간들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한국에서 보내준 '내마음속 대통령' 책을 읽었다.
그의 마지막 날들에 대한 부분들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조카사위인 정재성 변호사의 말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원래 여사님과 대통령님 사이는 좋은 편인데, 대통령님이 경상도 남자 아닙니까? 평소에 경상도 남자들이 그렇듯 사소하게 여사님을 타박을 많이 하시는 편입니다. 평소 같았으면 꽤나 타박도 하시고 하셨을텐데, 그런데 이상하셨대요. 여사님 말씀에 의하면 이번 사건만큼은 대통령님이 아무런 타박도 안하셨다고 합니다. 오히려 안심을 시키고 위로하셨다고 합니다. 그즈음 대통령님께서 말씀하시길 '이게 다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내가 아내를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 내 부덕의 소치다. 내가 좀 더 아내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내가 아내에게 경제적으로 믿음직했더라면 아내가 과연 이런 일을 했겠는가.' 하셨습니다.

그 5월, 책에 수록되어 처음으로 공개된 그의 미완성 증언.

[전문] 노무현의 최후진술... 서거 직전 글 중단(한국경제, 2009-10-07)

대통령이 된 본인과 주변 사람들 사이에는 가치관과 사명감,
책임감 이런 것이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친인척 관리라는 일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 관리를 철저히 하지 못하여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으니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형님까지는 단속이 쉽지 않았다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아내와 총무비서관의 일에 이르러서는 달리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대통령을 하려고 한 것이 분수에 넘치는 욕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국가적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꾼 지도자,
역사의 평가는 받는 지도자,
이 모두가 제 분수에 넘치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의욕이 저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마음으로 그들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원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미안한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려는 욕심을 부리지만 않았더라면
그들이 지금 이 고초를 당하는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야망이 있어서 준비하고 단련해 왔지만, 그들은 아무 준비가 없었습니다.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사람들을 위험한 권력의 세계로
제가 끌고 들어온 것입니다.

또 다른 원인은 제가 그들에게 경제생활에 대하여 신뢰를 주지 못한 결과일 것입니다.

아내는 오랫동안 이 문제에 관하여 불신과 불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런 정황에 관하여는 추후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총무비서관은 퇴임 후에도 이른바 집사의 역할을 할 사람이
자기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총무비서관은 퇴임 후 대통령의 사적인 경제생활의 규모에 관하여
저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당연히 연금의 범위 안에서 생활을 꾸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총무비서관은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분수를 넘은 저의 욕심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저는 이제 남은 인생에서 해 보고 싶었던 모든 꿈을 접습니다.
죽을 때까지 고개 숙이고 사는 것을
저의 운명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사법적 절차의 결과가 어떤 것이든 이 운명은 거역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하 생략)

'대통령이 된 본인과 주변 사람들 사이에는 가치관과 사명감,
책임감 이런 것이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야망이 있어서 준비하고 단련해 왔지만, 그들은 아무 준비가 없었습니다.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사람들을 위험한 권력의 세계로
제가 끌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는 하루하루 긴장의 끈을 풀 여유도 없이, 그야말로 깨지면 죽는 살얼음판인 곳을 건너온 사람이었고.
우리가 익히 잘 알듯이 사람이 단순히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옆 사람이 가진 고민과 내면의 깊은 것까지 잘 알고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설사 그것을 알고 느낀다 해도, 그 깊이까지는 알기 어렵다.

'마음으로 그들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원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가장 인간적인 고백. 그러나 원망스럽지만 원망할 수 없다.
왜냐하면...

'또 다른 원인은 제가 그들에게 경제생활에 대하여 신뢰를 주지 못한 결과일 것입니다.
아내는 오랫동안 이 문제에 관하여 불신과 불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결단의 전날들에 도달하고 있던 마지막 결론인 것 같다. '자신이 옆사람에게 경제생활에 대하여 신뢰를 주지 못했다'
이것이 스스로 자신에게 내린 유죄판결의 이유였을까.

2009년 5월 23일 새벽 5시 21분 그는 컴퓨터 앞에서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5시 26분에 1차로 저장, 5시 44분에 마지막으로 저장하고, 마지막 길을 나섰다.

우리가 살아야 할 삶에 대하여

Sunday, September 6th, 2009

이 글은 언제 다시 읽어도 가슴이 벅차고 또 부끄럽다.
단순히 글자들의 나열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의 삶을 말하는 것 같아서.
별이 되어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사람들에게선 예외없이 이런 성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세상엔 남에 대한 비난과 원망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자신이 굳이 지지 않아도 될 무게와 세상의 아픔까지 자기의 것으로 떠안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별 자신이 없지만 그래도 혹시나 나는 이 글을 당신께 드려봅니다.
영웅들로 가득찬 세상을 위하여.


In the daily lives of most men and women, fear plays a greater part than hope: they are more filled with the thought of the possessions that others may take from them, than of the joy that they might create in their own lives and in the lives with which they come in contact.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상에서는, 희망보다 두려움이 더 큰 역할을 한다. 그들은 자신의 삶과 그들이 접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그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쁨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로부터 빼앗아갈수 있는 소유에 대한 생각에 더 사로잡혀 있다.
It is not so that life should be lived.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삶의 방식이 아닐 것이다.
Those whose lives are fruitful to themselves, to their friends, or to the world are inspired by hope and sustained by joy:
자기 자신과 친구들 또는 세계에 유익한 삶을 사는 이들은 희망에 의해 영감을 받으며 기쁨으로 살아간다.
they see in imagination the things that might be and the way in which they are to be brought into existence.
그들은 가능한 것들을 상상하며,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에 대하여 생각한다.
In their private relations they are not pre-occupied with anxiety lest they should lose such affection and respect as they receive: they are engaged in giving affection and respect freely, and the reward comes of itself without their seeking.
사적인 관계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받았던 애정과 존경을 잃지 않기 위해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유롭게 애정과 존경을 줄 수 있으며, 굳이 구하지 않아도 그 대가는 그들에게 저절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In their work they are not haunted by jealousy of competitors, but concerned with the actual matter that has to be done.
일을 할 때도 그들은 경쟁자들의 질투에 휘말리지 않으며, 실제로 해야 할 실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In politics, they do not spend time and passion defending unjust privileges of their class or nation, but they aim at making the world as a whole happier, less cruel, less full of conflict between rival greeds, and more full of human beings whose growth has not been dwarfed and stunted by oppression.
정치적인 면에서, 그들은 그들 계급이나 국가의 부당한 특권을 옹호하는 데 시간과 정열을 낭비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세계 전체를 더 행복하고 덜 잔인하게 하며, 경쟁적 탐욕의 갈등이 줄어들게 하고, 억압에 의해 인간의 발전이 저해되거나 움츠러들지 않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A life lived in this spirit–the spirit that aims at creating rather than possessing–has a certain fundamental happiness, of which it cannot be wholly robbed by adverse circumstances.
소유보다 창조에 목적을 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에는 적대적인 상황조차도 완전히 빼앗아 갈 수 없는 어떤 근원적인 행복감이 있다.
This is the way of life recommended in the Gospels, and by all the great teachers of the world.
이것이 복음, 그리고 세계의 모든 위대한 선각자들이 설파한 삶의 방식이었다.
Those who have found it are freed from the tyranny of fear, since what they value most in their lives is not at the mercy of outside power.
이것을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삶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이 자신의 외부에 있는 힘이 베푸는 자비에 달린 것이 아니기에, 그들은 두려움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If all men could summon up the courage and the vision to live in this way in spite of obstacles and discouragement,
만약에 모든 사람들이 장애물과 낙담 속에서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상상력을 일으킬 수 있다면,
there would be no need for the regeneration of the world to begin by political and economic reform: all that is needed in the way of reform would come automatically, without resistance, owing to the moral regeneration of individuals.
개인들의 도덕적 각성으로 인하여, 세계의 변혁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저항없이 저절로 따라올 것이기에, 정치와 경제적 개혁에서부터 그 변혁을 시작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But the teaching of Christ has been nominally accepted by the world for many centuries, and yet those who follow it are still persecuted as they were before the time of Constantine.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많은 세월동안 말로만 받아들여져왔으며,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여전히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전 시대에서와 같이 박해를 받고 있다.
Experience has proved that few are able to see through the apparent evils of an outcast’s life to the inner joy that comes of faith and creative hope.
의지할 곳 없는 삶에서 마주한 불운 속에서도, 신념과 창조적인 희망에서 오는 내면의 기쁨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란 드물다는 것을 경험은 말해준다.
If the domination of fear is to be overcome, it is not enough, as regards the mass of men, to preach courage and indifference to misfortune: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두려움의 지배를 극복하기 위해 용기를 북돋아주고, 불행에 마음쓰지 말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it is necessary to remove the causes of fear, to make a good life no longer an unsuccessful one in a worldly sense, and to diminish the harm that can be inflicted upon those who are not wary in self- defense.
좋은 삶이 더 이상 세속적인 의미에서 성공적이지 못한 것이 아니도록 하고, 자신을 지키는데 조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질 수 있는 해악을 줄이기 위해서는, 두려움의 원인들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

버트런드 러셀, 자유로의 길
Roads To Freedom, By Bertrand Russell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Monday, June 29th, 2009

49재가 가까워지면서, 잔잔했던 마음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한다.

아주 작은 비석에는 '대통령 노무현', 비석 받침 바닥면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이 새겨진다고 한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노대통령 : 공부하러 가서 그렇게 딴 글을 열심히 쓰면 되는가?
나 : -_- (정신잃음). 그… 그러게 말입니다… (다시 횡설수설)…
(...)
노대통령 : 전에 보니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하는 것 같았는데, 그런게 참 중요한 것이네.
나 : 저도 그냥 신경 안 쓰고 편하게 살면 좋겠는데, 대통령님이 자꾸 불러내서…참여하고 깨어있으라 하시니 (약간 아부성 멘트, 비서관 웃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버린 짧았던 순간. 깨어있으라는 말은 그의 당부였을까, 나의 다짐이었을까.

하늘을 가리키는 사람과 땅을 가리키는 사람.
티마이오스를 들고 있는 사람과 윤리학을 들고 있는 사람.

나는 노무현을 죽인 나라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