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그의 '추가진술 준비'

무언가가 잘못되어 그 원인들을 되짚을 때, 그 원인들을 둘로 나눠보곤 한다. 일이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었던 부분과 할 수 없었던 부분.
대부분의 어리석은 사람들이 쉽게 빠지는 함정이 '자신이 할 수 있었던 부분'을 간과하고 '자신이 할 수 없었던 부분'을 남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여기서 시작되는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이 바로 수많은 불행의 씨앗이 된다.
그런데 사실 무언가를 돌이켜보면 돌이켜볼수록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부분' 에도 어쩌면 내가 할 수 있었던 부분이 또 있었음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사람이 큰다는 것은 바로 그런 순간들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한국에서 보내준 '내마음속 대통령' 책을 읽었다.
그의 마지막 날들에 대한 부분들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조카사위인 정재성 변호사의 말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원래 여사님과 대통령님 사이는 좋은 편인데, 대통령님이 경상도 남자 아닙니까? 평소에 경상도 남자들이 그렇듯 사소하게 여사님을 타박을 많이 하시는 편입니다. 평소 같았으면 꽤나 타박도 하시고 하셨을텐데, 그런데 이상하셨대요. 여사님 말씀에 의하면 이번 사건만큼은 대통령님이 아무런 타박도 안하셨다고 합니다. 오히려 안심을 시키고 위로하셨다고 합니다. 그즈음 대통령님께서 말씀하시길 '이게 다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내가 아내를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 내 부덕의 소치다. 내가 좀 더 아내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내가 아내에게 경제적으로 믿음직했더라면 아내가 과연 이런 일을 했겠는가.' 하셨습니다.

그 5월, 책에 수록되어 처음으로 공개된 그의 미완성 증언.

[전문] 노무현의 최후진술... 서거 직전 글 중단(한국경제, 2009-10-07)

대통령이 된 본인과 주변 사람들 사이에는 가치관과 사명감,
책임감 이런 것이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친인척 관리라는 일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 관리를 철저히 하지 못하여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으니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형님까지는 단속이 쉽지 않았다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아내와 총무비서관의 일에 이르러서는 달리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대통령을 하려고 한 것이 분수에 넘치는 욕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국가적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꾼 지도자,
역사의 평가는 받는 지도자,
이 모두가 제 분수에 넘치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의욕이 저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마음으로 그들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원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미안한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려는 욕심을 부리지만 않았더라면
그들이 지금 이 고초를 당하는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야망이 있어서 준비하고 단련해 왔지만, 그들은 아무 준비가 없었습니다.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사람들을 위험한 권력의 세계로
제가 끌고 들어온 것입니다.

또 다른 원인은 제가 그들에게 경제생활에 대하여 신뢰를 주지 못한 결과일 것입니다.

아내는 오랫동안 이 문제에 관하여 불신과 불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런 정황에 관하여는 추후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총무비서관은 퇴임 후에도 이른바 집사의 역할을 할 사람이
자기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총무비서관은 퇴임 후 대통령의 사적인 경제생활의 규모에 관하여
저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당연히 연금의 범위 안에서 생활을 꾸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총무비서관은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분수를 넘은 저의 욕심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저는 이제 남은 인생에서 해 보고 싶었던 모든 꿈을 접습니다.
죽을 때까지 고개 숙이고 사는 것을
저의 운명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사법적 절차의 결과가 어떤 것이든 이 운명은 거역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하 생략)

'대통령이 된 본인과 주변 사람들 사이에는 가치관과 사명감,
책임감 이런 것이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야망이 있어서 준비하고 단련해 왔지만, 그들은 아무 준비가 없었습니다.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사람들을 위험한 권력의 세계로
제가 끌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는 하루하루 긴장의 끈을 풀 여유도 없이, 그야말로 깨지면 죽는 살얼음판인 곳을 건너온 사람이었고.
우리가 익히 잘 알듯이 사람이 단순히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옆 사람이 가진 고민과 내면의 깊은 것까지 잘 알고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설사 그것을 알고 느낀다 해도, 그 깊이까지는 알기 어렵다.

'마음으로 그들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원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가장 인간적인 고백. 그러나 원망스럽지만 원망할 수 없다.
왜냐하면...

'또 다른 원인은 제가 그들에게 경제생활에 대하여 신뢰를 주지 못한 결과일 것입니다.
아내는 오랫동안 이 문제에 관하여 불신과 불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결단의 전날들에 도달하고 있던 마지막 결론인 것 같다. '자신이 옆사람에게 경제생활에 대하여 신뢰를 주지 못했다'
이것이 스스로 자신에게 내린 유죄판결의 이유였을까.

2009년 5월 23일 새벽 5시 21분 그는 컴퓨터 앞에서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5시 26분에 1차로 저장, 5시 44분에 마지막으로 저장하고, 마지막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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