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anuary, 2009

공공부문을 어찌할건가

Thursday, January 29th, 2009

경제활동인구라는 것을 말할때는, 다음과 같이 분류를 한다.

  • 경제활동인구
    • 취업자
    • 실업자
  • 비경제활동인구

청년층을 이야기할 때, 비경제활동인구에 학생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는데, 취업시험준비자도 이 부분에 들어가는 모양이다. 그러니 실업률을 말할때는 경제활동인구에서 실업자로 분류되는 사람은 들어가지만, 이렇게 시험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은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인듯 하다. 바로 이 점이 국가가 발표하는 실업률의 퍼센트가 크게 높지 않은 이유가 되지 않을런지. 이렇게 시험공부 하고 있는 사람들은 통계에서 빠져있기 때문이다.

청년층의 경우, 경제활동과 비경제활동의 비율이 반반 정도 되는 듯하다. 이제 여기서 비경제활동 부분을 보기 위해, 2008년 5월의 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의 청년층 통계조사를 살펴보면, 참으로 놀라운 결과를 보게 되는데...

비경제활동인구의 10%가 이런류의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고, 보다시피 대다수가 공기업, 교사, 공무원, 고시의 카테고리에 들어가게 된다.

이 젊은이들의 경쟁이 과연 대한민국 통계청을 구글같은 조직으로 만들만큼 혁신의 기운을 가져올 것인가 생각해 보면, 별로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사회적으로 보자면, 너무 많은 인력을 허공에 낭비하고 있는 셈인데, 공공부문을 어떤 식으로든 변화시켜, 이 흐름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된다. 이 비율은 너무 크지 않은가...

이명박님이 섬기는 정부 만든다고 공공부문에 칼을 많이 대려고 하고 있지만, 크게 믿음은 안 가는 것이 사실인데, 이렇게 변화가 필요한 부분에 있어서는 어쨌든 생산적인 방향으로 정부정책이 갈 수 있도록 논리들을 만들어야 할텐데, 정치가 너무 안 돌아간다. 경제위기라는 대대적이며 포괄적인 개혁의 좋은 찬스가 왔음에도, 하겠다는 것도 크게 믿음이 안가는 얼빵정부를 뽑아놓았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가 없다.

국가통계2.0

Wednesday, January 28th, 2009

앞으로는 국가통계 읽는 법을 하나씩 공부해보려 하는데, 그러다가 생각이 퍼뜩 하나 지나간다.

일전에 '노인자살과 국가통계'에서도 말미에 언급했지만,

나는 한 국가의 기초가 얼마나 튼튼한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각종 기록물들이 얼마나 잘 관리되고, 얼마나 체계적인 통계 인프라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에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들고 싶다. 참여정부에서는 국가의 기록 관리 능력이 많이 향상되었는데, 참여정부 시즌 2에서는 통계 기능을 훨씬 더 강화해야 할 것이다. 과학의 마음이 필요하다. 아무튼 이러한 기준에서는 아마도 미국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한국에서 친미라고 떠벌리는 인간들은 좀 병진들이 많아서…

통계학은 영어로 statistics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기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From German Statistik, political science, from New Latin statisticus, of state affairs, from Italian statista, person skilled in statecraft, from stato, state, from Old Italian, from Latin status, position, form of government; see st- in Indo-European roots.]

라 하여, 정치라던가 국가라던가 하는 뜻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이는 state라는 단어의 존재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니 사실 국가통계라는 말은 영어로 번역을 하게 되면, 동어반복의 여지가 있다. 국가를 운영한다는 것은 통계를 떼어놓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블로거들이 시민사회의 담론생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현실에 대한 영향력은 일단 둘째치자. 이러한 것들이 사실 사소해 보이기는 해도, 딱 요정도의 적극성이야 말로 실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떠받치고 매우 중요한 자원이라고 본다.

민주주의국가를 만들기 위하여 시민들의 참여가 요청되는 것이 사실이라지만, 현실적으로 공공의 사안에 대해 어떠한 전문성을 가지고 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지나가는 한마디 발언이라도 하려는 사람들의 비율이란 절대로 한자리수 이상의 퍼센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그 정도의 싸움이라 한다면, 키보드워리어들의 참여지수라는 것은 절대로 간과할 수가 없다. 참여민주주의의 꽤 중심부에 놓여 있는 것이다. 키보드 워리어들은 긍지를 가질 필요가 있다.

지금 하는 말들은 이들을 일단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데, 나는 대한민국 통계청이 구글수준의 사용자 편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2.0기관이 되면 좋을 것 같다. 각종 통계를 차곡차곡 쌓는 것은 기본이고, 사람들이 다종다양한 통계들을 홈페이지나 블로그에 퍼다가 사용하기 쉽게, 최대한의 각종 편의를 제공하는 서비스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민들이 생산하는 공공 담론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시민사회가 다양한 국가의 통계를 모니터링하게 되므로, 그만큼 위기에 대한 인지능력도 좋아질 수 있는 것이다. 근거있는 담론의 생산을 유도한다는 점에서도 좋고, 국가의 통치에 시민참여를 유도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것이, 바로 이 땅에 마침내 수학문명이 건설되었을때 만개할 '민주정치'의 비전...ㄷㄷㄷ

통계청을 구글처럼 바꿔놓았을때, 어떤 서비스를 제공해 주면 좋을까...

전주MBC 특집다큐 서울공화국

Tuesday, January 27th, 2009

전주 MBC에서 작년 4,5월에 방송한 2부작 다큐인데요. 그 존재를 지금에서야 알았네요. 참 볼만합니다. 참여정부의 정책이 모두 뒤집히고 있는 지금,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는데, 다시 때가 온다면 그 때는 좀더 세련되게 해내면 좋겠네요.

향후 한국정치의 가장 중요한 아젠다 중 하나이므로, 꼭 봐두시길 권합니다. 이런 좋은 걸, 전국에서도 한번 틀 수 있으면 좋겠네요.

화면 캡처한 것으로, 3분짜리 그림 프레젠테이션을 만들어두었습니다.

dropbox를 이용하여 두대의 컴퓨터에서 파이어폭스 싱크하기

Sunday, January 25th, 2009

파이어폭스에서의 개인사용자 설정은 프로필이라는 이름으로 관리된다. 파이어폭스의 프로필 관리하기 페이지에 자세한 정보가 나와 있다.

이제껏 이러한 것을 모르고 사용해왔다면, 대개의 경우는 하나의 프로필이 사용되어 왔을 것이고, 그 프로필의 위치는 기본적으로 "C:\Documents and Settings\사용자이름\Application Data\Mozilla\Firefox\Profiles\*******.프로필이름" 으로 주어진다. 이 폴더를 만약 통째로 카피하면, 다른 컴퓨터에서도 다음과 같이 프로필 생성작업을 거쳐 똑같은 설정하에 파이어폭스 사용이 가능해진다. 다음 정보는 위에 언급한 파이어폭스의 프로필 관리하기 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임.

 

프로필 생성하기

  1. 프로필 생성 마법사를 시작하려면, 프로필 관리자의 프로필 만들기...를 클릭하십시오..

  2. 다음을 클릭하고 프로필 이름을 입력하십시오. 프로필 이름은 어떤 사람이 사용하게되는 프로필인지 설명되는 이름이라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사용자 이름은 좋은 선택입니다. 여기서 입력한 이름은 인터넷 상에 공개되지는 않으므로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3. 사용자 데이터를 다른 컴퓨터로 내보내려하거나 설정할 계획이라면 프로필을 어디에 저장할 것인지도 정할 수 있습니다. 사용자 시스템 상의 저장 장소를 선택하려면 폴더 선택...을 클릭하십시오.

    •  

      주의: 프로필에 대한 사용자 임의 위치를 선택했다면 새 폴더 혹은 내용물이 아무 것도 없는 폴더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프로필 삭제를 선택하면, 같은 폴더에 저장되어있는 모든 내용이 같이 삭제되기 때문입니다.


  4. 새 프로필을 생성을 완료하려면 완료를 클릭하십시오.

  5. 새 프로필이 프로필 관리자에 나타납니다.

 

이것이 파이어폭스의 사용자설정을 싱크하기 위한 기본적인 원리이다.

그러나 문제는 똑같은 프로필을 카피한다고 한들, 두 대의 컴퓨터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서로 다른 진화경로를 밟게 된다. 꼭 필요한 설치같은 것이 있다면, 두 번씩 해줘야 하는 불편함도 따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두 대의 컴퓨터에서 언제나 똑같은 설정이 유지될 수 있도록 싱크를 해줘야 한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구글에서 제공하는 google sync 라는 것이 있었지만, 더 이상은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방법이 필요한 터였다.

그러던 차에 오늘 dropbox라는 파일공유 서비스를 알게 되었는데(yy님에 의해 공유된 "파일 공유, 백업 서비스 드랍박스" 페이지를 통해 알게 되었음), 사용해보니 두 대의 컴퓨터에서 일반적인 파일들의 싱크가 잘 이루어진다. 다른 면에서도 꽤나 유용하겠지만, 특별히 두 대의 컴퓨터를 사용하는 나에게 꼭 필요했던 파이어폭스 프로필의 싱크도 잘 작동한다.

원리는 간단하다. 두 대의 컴퓨터에서 파이어폭스 프로필의 위치를 모두 dropbox를 통해 공유되는 위치로 지정한다. 즉 한대의 컴퓨터에 있는 프로필의 위치를 dropbox에 공유되는 곳으로 옮겨놓은다음, 프로필 생성 메뉴를 통해 기존 프로필을 삭제하고, 프로필을 새 위치에 지정하여 생성한 다음, 다른 컴퓨터에서도 dropbox를 설치하고, 그 다음  맨 위에서 언급한 파이어폭스 프로필 생성 메뉴를 통해 적당히 작업을 해주면, 싱크가 완료된다.

새 시대의 윤리학

Saturday, January 24th, 2009

내가 고딩시절에 촌구석에서 '과학영재'라는 타이틀을 달고 공부하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들였고 가장 재밌게 한 것이야 물론 수학이었지만, 그것말고도 재밌게 공부한 것 다른 하나를 꼽자면 '과학영재'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을법한 '시'가 되겠다. 3학년이 되어 이제 수능시험 공부를 하려니, 수업시간에는 잠만 퍼자고 그간 전혀 관심이 없었던 국어니 문학이니 하는 것들이 아주 골칫덩어리가 되었지만, 그래도 그 중에서 다른건 몰라도 '시'를 읽는 것이 재미있을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꽤 큰 수확이었다. 내가 꽤 좋아했던 여러 시가 있지만 그 중의 하나로, 서정주의 '국화옆에서' 가 있다.

국화 옆에서
- 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물론 예전에 오마이뉴스에서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가 친일시?' 라는 기사도 있고 그렇지만은, 진실은 알기 어려운 것이고, 나는 이 시를 여전히 좋아한다!

이 시를 가지고 낼 수 있는 문제를 한번 보자.

1. 이 시의 시상을 형상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종교적 사상은 무엇인가?
<모범답> 불교 인연설(연기설)
...
4.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치고, 무서리가 내렸다는 말은 그 자체로는 매우 비과학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진실일 수 있는 이유를 이 시인이 속한 <생명파>와 관련해서 80자 내외로 설명해 보라.
<모범답> 하잘것없는 하나의 생명체라도 그것이 탄생하기까지에는 전우주적인 참여가 있어야 한다는 생명의 존엄성에 관한 인식에 근거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 때도 이런 비슷한 해석을 봤던 기억이 있는데, 이런것을 읽으며 사실 나는 어린 마음에 무진장 큰 감동을 받았었다. 나는 이러한 류의 생각들을 늘 좋아했다. 이 세계의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연결성에 대해 사색하는 것은 사실 나의 가장 중요한 테마라 할 수 있는데, '집에서 전하는 생태학 강좌' ㅋ 같은 것도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배경에 놓여 있다.

제레미 리프킨의 '유러피안드림'에는 이러한 부분이 나온다.

471p 적어도 서양의 경우 도덕성의 현 개념은 너무 직선적이고 제한적이다. 한편 현 시대는 한 가지 행동이 미치는 영향이 세계 전체에 미치고 그 파급 효과가 시스템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런 도덕성의 개념으로는 지금의 인간 행동을 조절하는데 무리가 있다. 바로 그것이 문제다. 서양의 도덕은 십계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모두 개인적이고, 식별하기 쉬우며, 일상적인 해악을 경계하는 도덕성에 기초하고 있다. 살인, 절도, 거짓말, 간통 등은 한 사람이나 집단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 가하는 행위로 누구나 쉽게 식별할 수 있다. 그런 행위는 그 책임을 묻기도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그것은 "직접적인 나쁜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촘촘히 연결되는 글로벌 사회에서는 "간접적인 나쁜 행위"로 표현될 수 있는 새로운 도덕성이 존재한다. 간접적인 나쁜 행위는 그 결과가 너무도 멀리 떨어져 엉뚱하게 나타나 인과 관계를 찾을 수 없고 죄의식도 느낄 수 없으며, 집단적 책임감으로도 그런 행동을 처벌할 수 없는 경우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보자. 현재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이 스포츠다목적차량을 보유하고 있다. SUV를 운행하면 다른 승용차들에 비해 많은 휘발유가 소모된다. 그 결과 그 배기 가스로 대기 중에 많은 이산화탄소가 배출되어 공기 오염으로 지구 온난화를 가속화시킨다. 교육 수준이 높은 엘리트층은 SUV와 지구 온난화 사이의 관계를 의식하겠지만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거나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텔레비전에서 기록적인 강우량, 해안 지방의 침수, 인명과 재산 피해가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라는 뉴스를 보겠지만 자신들이 SUV를 몰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그런 끔찍한 재난이 발생했다고 생각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중략)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유럽과 미국의 청소년 수백만 명이 나이키 같은 유명 브랜드의 운동화를 신는다. 그들은 그 신발이 끔찍한 작업 환경 속에서 어린이들을 착취하는 베트남의 한 공장에서 만들어졌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들이 비참한 작업 환경에 대해 전해듣고 그런 신발을 구입하는 행위가 먼 나라의 어린이들이 착취당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476p 그렇다면 문제는 이것이다. 세계적이고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광대하고 포괄적인 새로운 도덕성을 우리가 어떻게 갖출 수 있을가? (그 도덕성은 '나 자신'과 '다른 사람 및 사물'사이를 잇는 가교가 되어야 한다.) 다양한 외양으로 나타나는 간접적 나쁜 행위를 정확히 식별할 수 있는 시스템적 윤리관을 우리가 과연 확립할 수 있을까? 직접적인 이웃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소속되어 있는 지구 공동체의 관계에서 과연 우리가 도덕의 황금률을 실천할 수 있을까? 매우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글로벌 의식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점점 하나가 되어 가고 있는 이 세계는 '개인적이고, 식별하기 쉬우며, 일상적인 해악을 경계하는 도덕성'에 기초한 윤리만으로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드라망은 불교의 연기법을 상징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입니다.
인드라(Indra)는 본래 인도의 수많은 신 가운데 하나로 한역하여 제석천(帝釋天)이라고 합니다. 신력(神力)이 특히 뛰어나 부처님 전생 때부터 그 수행의 장에 출현하며 수행을 외호(外護)하는 신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제석천의 궁전에는 장엄한 무수한 구슬로 만들어진 그물(=인드라망)이 있다고 합니다.

제석천 궁전에는 투명한 구슬그물(인드라망)이 드리워져 있다. 그물코마다의 투명구슬에는 우주삼라만상이 휘황찬란하게 투영된다. 삼라만상이 투영된 구슬들은 서로서로 다른 구슬들에 투영된다. 이 구슬은 저 구슬에 투영되고 저 구슬은 이 구슬에 투영된다. 작은 구슬은 큰 구슬에 투영되고 큰 구슬은 작은 구슬에 투영된다. 동쪽 구슬은 서쪽 구슬에 투영되고 서쪽 구슬은 동쪽 구슬에 투영된다. 남쪽 구슬은 북쪽 구슬에 투영되고 북쪽 구슬은 남쪽 구슬에 투영된다. 위의 구슬은 아래 구슬에 투영되고 아래 구슬은 위의 구슬에 투영된다. 정신의 구슬은 물질의 구슬에 투영되고 물질의 구슬은 정신의 구슬에 투영된다. 인간의 구슬은 자연의 구슬에 투영되고 자연의 구슬은 인간의 구슬에 투영된다. 시간의 구슬은 공간의 구슬에 투영되고 공간의 구슬은 시간의 구슬에 투영된다. 동시에 겹겹으로 서로서로 투영되고 서로서로 투영을 받아들인다. 총체적으로 무궁무진하게 투영이 이루어진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이러한 세계에 대한 비유는 오늘의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윤리학의 기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동시에 겹겹으로 서로서로 투영되고 서로서로 투영을 받아들인다. 총체적으로 무궁무진하게 투영이 이루어진' 세계에서는 한 사람의 행위가 눈앞에 있는 사람뿐이 아니라 먼 곳의 수많은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칠수 있게 된다. 내가 흔들리면 내 속에 비춰진 남도 흔들리고, 그래서 다시 내가 흔들리게 되는 세상. 개인의 이익이라는 것도 이제는 무수한 일들의 결과로 마침내 자신에게 되돌아올 것이 무엇인지까지 고려되는 개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더 많은 사람들이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치고, 무서리가 내렸다'는 말을 이해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