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제

강희제는 청나라의 네번째 황제로 1661년부터 1722년까지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 위키의 '강희제' 항목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이렇게 내외로 청나라의 국위를 튼튼히 세워 당시까지도 중국 최고의 제왕으로 불리던 당 태종(唐太宗)보다 더 뛰어난 업적을 남겨 100년이 넘는 청나라의 전성기이며 중국 역대 황조 중 마지막 태평성대인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일으켜 아들인 옹정제(雍正帝), 손자인 건륭제(乾隆帝)까지 태평성대가 지속되었으며,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자 명군, 즉 천고일제(千古一帝, 천년에 한 번 나올 만한 황제) 또는 연호를 따서 강희대제(康熙大帝)로 칭송받으며 또는 그의 리더십과 결정력, 통찰력을 높이 사서 ‘최고경영책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을 모두 갖춘 황제’로도 불리며 아직까지도 많은 중국인에게 존경받는다. 그는 당시 서양에서 역시 절대 왕정을 수립한 루이 14세,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 표트르 1세 등 업적이 많은 유럽의 여러 군주와 더불어 당시 아시아를 대표하는 통치자였다. 또한 아들 35명과 딸 20명을 두어 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자녀를 둔 황제이기도 하다.

나는 16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서양의 대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은데, 그러한 가운데, 이 강희제의 이야기를 조금 알게 되었다. 주경철의 대항해시대에서 메모한 바를 보자면,

예수회
서양 고전, 논리학, 수학, 자연과학 등의 분야에서 상당한 정도의 쌓고 그것을 바탕으로 전도
당대 최고 수준의 과학자는 아니지만, 최신 과학 지식을 흡수한 엘리트
대부분 어학 능력이 뛰어남
마테오 리치가 중국 사회에 깊숙이 진입할 수 있었던 것도 중국 고전들을 해독하고 한문 저작을 쓰는 어학실력 때문에 가능

강희제
유럽 선교사들로부터 스스로 수학을 배울 정도로 유럽 과학과 기술에 관심
십자가보다 시계에 더 마음이 간 것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예수회 신부들을 보냈을 때 의도적으로 수학에 능통한 사람들을 선발
이들의 명칭은 '국왕의 수학자들'
이 때의 수학 내용은 대개 캘린더 제작을 위한 계산법 위주
17-18세기 수학이라기보다는 르네상스 수학
데카르트, 뉴튼, 라이프니츠 등의 업적은 전달되지 못함
수학에 정통한 선교사들과 매일 2-3시간씩 수학을 논할 정도
그러나 이를 통해 황제를 개종하고 더 나아가서 중국 전체를 선교하겠다는 전략은 애초에 가능성이 없었음
강희제가 수학을 좋아하는 것과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
'주자전서'를 편찬할 정도로 주자학을 확고부동한 기본으로 삼은 인물

이 정도라면 전설적인 '호학'의 군주라 할만하다. 시대로보나, 행위로보나, 조선 '정조'가 모델로 삼았을 만한 인물로 보이는데, 어떤 역사적인 연계가 있을지 궁금하다.

조너던 스펜스의 '강희제' 에는 강희제가 죽기 5년전 남긴 고별 상유 (상유 上諭 왕의 말씀)가 수록되어 있다. 정신이 또렷한 상태에서 남기고자했던 세상에 전하는 유언이라고 보면 되겠다. 다음과 같은 부분이 내 눈에 띄었다.

짐이 태어났을 때 결코 신령스럽거나 기이한 징조들이 보이지 않았다. 또 자라날 때도 신기한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여덟 살에 제위에 오른 후 지금까지 57년 동안 역사책에 실려있는 상서로운 별, 상서로운 구름, 기린과 봉황, 지초가 나타나는 경사라든가 궁궐 앞에 불타는 진주와 옥이 나타나거나 천서가 하늘의 뜻을 나타내려고 떨어지는 것 따위의 하늘에서 내려준다는 상서로운 조짐은 사람들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모두 헛된 말일 뿐이다. 짐은 감히 그렇게까지 (잘 다스렸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하루하루의 일상을 진실된 마음을 갖고 실제에 도움이 되도록 다스렸을 뿐이다.

이 담백한 고백에서 진실로 훌륭했을 것같은 인간의 면모를 보게 된다. 예수는 태어날 때 별이 반짝거렸다고 했는데, 예수회가 왜 강희제에게 기독교를 전하는데 실패했으며, 수학만 가르쳐주었어야 했는지 쉽게 이해가 간다.

이러한 계몽군주의 장기간 치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백년후 동양세계는 서양에게 완전히 발려버리게 되었으니, 무엇이 문제였을까. 나는 그것이 알고 싶다.

One Response to “강희제”

  1. 고대그리스의 바탕위에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서양에는 실제생활과는 유리된 학문을위한 학문이 발달하게 됩니다. 갈릴레오,데카르트가 수학과 학을 천작한 것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진실에의 탐구에 가까왔습니다.
    서양의 수학 물리학이 동양을 앞선것은 이미 명나라때부터지만 그것이 바로 산업혁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서양의 기술 자체가 동양을 압도한것은 한참 후의 일이 됩니다. 또 그것이 백성들의 삶자체에 까지 영향을 준것은 또 그 다음이지요. 즉 중국의 생활수준은 강의제때는 영국보다 떨어지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순수수학에서 물리학 공학으로 이어지는 필연적 발달과정이 작동하게 되면서 15세기에는 수학에서 16,7세기에는 기술과학에서, 18세기이후로는 민중들의 생활수준에서도 서양에 추월당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만일 강희제가 수학이 만학의 근본이며 의도하지않아도 결국 과학, 공학의 과정을 거쳐 필연적으로 산업혁명을 일으키게 되는 것을 알았다면 중국도 수학을 널리 보급해서 서양과 비슷한 과정을 겪었을지 모르겠지만 너무나 현실추구적인 중국인들이 공리공론인 순수수학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므로 뿌리 내리기는 어려웠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