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부와의 대화

오늘은 싸부의 다른 제자 한명과 함께 싸부에게 가서, 다음 학기에 등각장론(conformal field theory)에 대한 세미나를 하나 계획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it's a wonderful idea' 라면서 좋다고 한다. 그래서 준비해서 발표할만한 토픽들을 좀 뽑아달라고 부탁했더니 자기 역시 등각장론의 정의조차 모른다면서 고민을 시작한다.

싸부는 이거하라 저거하라 먼저 시키는 적이 없다. 그러나 물어보면 답해준다. 다정한 보살핌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불만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런 것이 원칙적으로 그다지 잘못된 방향은 아니다. 제대로 된 학자가 되려면, 나름대로의 관점과 관심이 진화하는 방향에 따라 성장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거 하라 시켜주고, 저거 하라 시켜주기 바라면서 스스로 커가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나중에 학위받고 쓸모없는 사람이 되기 쉽다. 수학은 집단적 지성의 산물인 동시에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시키지도 않는 세미나를 먼저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이런 것이다. 먼저 시키는 법이 없으니, 할 일을 내가 만들어서 가져간다. 그러나 사실 나는 이것이 해야할 일인지는 아는데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는 모르는 상태다. 그러므로 토픽을 뽑아달라 부탁하는 것이다. 그러면 싸부는 분명히 고민할 것이고, 여러가지 제안을 줄 것이다. 그러면 최악의 경우라도 엉뚱한 방향으로 가지는 않게 된다. 이러면 자유방임형의 싸부 밑에서도 사실은 나 자신을 안전한 가이드 속에 둘 수 있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다. 꼭 내가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이 존재할 수는 없다. 변화시키는 것도 많은 경우 힘든 일이다. 인간의 행동패턴을 이해하고, 미리 나에게 우호적인 환경을 조직하라. 이것이 요즘 나의 화두이다.

6 Responses to “싸부와의 대화”

  1. 상일 says:

    마지막 말이 와닿네....그래도 자기한테 소중한 사람들에게 적용하긴 힘들어

  2. 상일 says:

    나도 싸부가 있었으면 좋겠다

  3. gobears says:

    참 훌륭해요~!^^

  4. pythagoras says:

    gobears님/ 싸부의 정신세계를 다룬 글을 하나 발견했는데, 여러모로 흥미진진하군요.
    http://leitl.org/docs/a-professor-of-mathematics.pdf

  5. gobears says:

    링크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진정한 덕후멘탈의 대가가 아니신지 ㅎㅎ
    아이와 같이 순수한 보셔 교수님 스토리를 읽으니 입가에 살짝 미소가 머금어 지면서 AS이 상당히 매력적인 증후로 보이네요.

    남성들이 대체로 여성보다 소셜 클루가 약하지요.
    님 사부같이 그런 기질적 요인이 극명하게 발현된 돌연변이들은 인류로 봐선 귀중한 천재집단 이겠고 저처럼 평범한 사람에겐 그저 경외스러운 아름다움의 대상 이지요.

    진흙길 속으로 걸어가는 수학자라..

    싸부의 자유방임형 교육은 의도적이라기보다 필연이지 싶은데요.
    바머님은 어떤 싸부 아래서도 균형있는 배움을 찾아내는 훌륭한 제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

  6. pythagoras says:

    gobears님/ 요즘 듣보잡들이 자기가 너드네, 긱이네 하는데, 살짝 가소로와집니다. 저는 매우 정상인입니다. 쿠쿠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