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개월의 씨름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심심할 때 아무 책이나 뒤져서 뽑아 풀던 수학 문제들을 노트에 적어 왔다. 문제와 함께 날짜를 기록해 두었는데, 작년 4월 중순 정도에 처음 시작한 것 같다. 굉장히 많은 양이 적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꽤나 오랫동안 만져서 그런지 노트에 때도 많이 탔고, 조금은 너덜너덜하다.
어떤 문제에는 내가 짧은 주석을 달아두었다. 가령 '재밌는 문제','못 풀었음' 등등. 대단한 것은 못 되지만, 당시에 내가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를 알아볼 수가 있어서 나름대로는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어젯밤에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못 푼 것으로 표시되어 있는 한 문제를 붙잡고 풀어 보았다. 처음에는 삽질도 했지만 한 시간 정도 후에는 만족스런 풀이를 얻을 수 있었다. 그 문제가 기록되어 있는 날짜가 99년 12월 9일로 되어 있으니, 문제를 접하고 풀기까지 11달 가량이 걸린 셈이다. 물론 매일같이 그 문제와 씨름했던 것은 아니지만..

실수는 없었는지 풀이를 다시 살펴보면서, 군더더기가 없는 것 같아 내심 만족스러웠다. 문제를 푸는데는 B4 용지가 거의 한 장 가득 사용됐다. 하지만 실제로 문제에 대한 풀이는 종이의 한 구석에 몇 줄 안 되는 분량으로 쓰여 있다. 그럼 종이의 나머지 부분에는 무엇이 쓰여 있는가..

거기에는 풀이와는 전혀 상관없는 부등식이 쓰여 있고, 얼토당토 않은 명제도 몇 줄 쓰여 있다. 풀이와 관련되어 있는 몇 가지 계산도 기록되어 있고, 그림도 몇 개 그려져 있다. 결과적으로는 사실상 없어도 됐을 이 종이 한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많은 것들을 듣고 배우는 과정에서, 내가 항상 관심을 갖는 것은 그는 어떻게 해서 그러한 발상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가령, 왜 행렬의 곱이라는 것을 저렇게 괴상하게 정의했겠는가 하는 고민이 그것이다. 고민을 해야하는 까닭은 보통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은 교과서에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뉴턴은 자신이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보았다고 했다. 그런 고민을 하는 것은 누군가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가 밟았던 모든 과정을 거쳐야만 그의 어깨 위에 올라 설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의 풀이 중에서, 진짜로 중요한 것은 사실 단 한 줄 뿐이다. 그 한 줄은 겉보기엔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지만, 난 그 하나를 얻기 위해 열한달을 기다려야 했던 셈이다. 속지 마라. 무심코 넘어간 한 줄에 모든 비밀이 담겨 있는 법이다.

남을 이해하기 전에 나를 이해하고 싶었다. 나의 생각이 어떻게 해서 거기에 닿게 되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우습게도 난 내가 왜 그 생각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만약 그 문제를 오늘이나 내일 풀어보았다면, 내가 다시 그 풀이를 얻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는 말이다. 나같이 하찮은 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작용도 이해할 수가 없는데, 대가들의 경우에 대해서 정말 신비로운 것이라고 밖에 말하지 못하겠다면 억지일까...

지난 일년동안 난 일년 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이론들을 익혀왔다. 난 앞에서 실제로 문제의 풀이가 되는 부분은 넓은 종이에서 구석의 몇 줄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엔 굉장한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것들만 쓰여 있을 뿐이다.

문제를 풀기 위해 고민한 한 시간 동안, 내 머릿 속에서는 내가 가진 경험들과 함께 부등식에 대한 이론들과 선형대수학의 이론, 정수론, 거리공간론 등이 스쳐 지나갔다. 연습지의 대부분은 그런 것들에 대한 나의 생각의 자취가 남아 있는 것이다.

몰랐을 땐 도달할 수 없었지만, 알고 난 후에는 확신할 순 없지만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위에서 말한 신비로운 작용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될 수는 있지 않을까.

그리고 하나 더, 단 몇 줄의 결과 위에는 한 장 가득한 과정이 있었다는 것.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