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dington, Sir Arthur (1882-1944)
Human life is proverbially uncertain; few things are more certain than the solvency of a life-insurance company.
In J. R. Newman (ed.) The World of Mathematics,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56.

고장난 한국정치

정치가 썩었다고 고개를 돌리지 마십시오. 낡은 정치를 새로운 정치로 바꾸는 힘은 국민여러분께 있습니다.

노대통령이 좋았던 것은, 바로 그의 이런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기가 다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 진실함. 오늘따라 좀 그립다.

저 혼자 경제를 살릴 수 있다던 거짓말쟁이를 선택한 대한민국은 지금 그 혹독한 대가를 치루고 치르고 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이것은 인과응보인 것이고, 응당 그 치러야 할 대가를 치루는 치르는 것 뿐이다. 나는 이메가를 뽑지 않았읍니다라지만, 우리는 결국 이메가를 뽑았다.

1년전 이미 열린우리당에서 쫓겨났던 노대통령은 울부짖고 있었다. 자신은 결국 밀려 나올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열린우리당의 창당정신만큼은 지켜달라고…

열린우리당의 창당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정치의 정도입니다. 결국은 정도로 가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국민들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린우리당의 창당 선언문, 지금 읽어 보아도 감동이 있습니다.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의 용기와 결단, 희생과 헌신, 열정이 엉겨 있습니다. 인생을 바쳐 이루어 내야 할 가치가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주어야 할 도도한 역사가 있습니다. (2007.5.7 ‘정치인’ 노무현의 좌절 )

믿고 지지할 수 있는 야당이라도 있었더라면, 지금쯤은 다시 기운을 되찾고 희망을 만들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최근 기사를 보니, 통합민주당의 정당지지율이 13.5%라고 한다. 참고로 딴나라당은 32.7%. (이명박 대통령 지지율 다시 하락) 신뢰를 완전히 상실한 집단이니만큼 의원들이 단체로 가서 물대포라도 맞으면서 몸으로 때우면 좀 나아지려나만은… 어쨌든 이들의 지난시절 무책임한 정치행위는 절대로 쉽게 용서해서는 안되는 성격의 것이다.

한국정치는 이제 완전히 고장나 버린 것 같다. 아무리 고민을 해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답이 안 나온다.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서식하는 거대정당들, 지역구도를 지속시키는 소선거구 단순다수제 중심의 선거제도, 강한 당론을 특징으로 하는 기율이 강한 정당문화와 대통령제의 불안정한 결합, 국민들의 낮은 정치의식…

그리하여 이 고장난 한국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대통령제와 내각제, 양당제와 다당제, 단순다수제와 비례대표제, 대중정당과 원내정당, 책임성과 합의성… 한국적 토양 위에서 과연 이들중 어떤 것들을 결합하면, 치러야 할 비용이 크지 않으면서도, 정치의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수많은 고민들을 해보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답을 찾을 수가 없다. 견고한 지역주의와 낮은 정치의식을 가정하는 한은…

한국의 제도적인 측면, 의식적인 측면 모두에서의 초라한 정치 수준의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좋은 정당들을 만들고 가꾸고 지키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이 부끄러운 시대는 참으로 오랜 시간 계속될 것 같다.

리만의 제타함수 (9) : 소수는 무한히 많다(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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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만의 제타함수 (2) : 수의 체계

리만의 제타함수 (3) : 실수란 무엇인가

리만의 제타함수 (4) : 지수법칙

리만의 제타함수 (5) : 지수의 실수로의 확장

리만의 제타함수 (6) : 자연상수

리만의 제타함수 (7) : 오일러의 공식 - 박사가 사랑한 수식

리만의 제타함수 (8) : 소수는 무한히 많다(i)

수학 얘기를 하려던 피타고라스의 창이, 시국이 어수선할때는 바람직한 정체(政體)에 대하여 논하는 플라톤의 창(??)이 될 때가 있으니, 이 점 독자들의 양해를 바란다. (나라꼴이 저게 뭐냔 말이야…) 아무튼 그리하여 실로 오랜만에 시리즈를 재개한다.

지금까지 리만의 제타함수라고 제목을 걸고 여기까지 왔는데, 사실 리만의 제타함수가 뭔지 아직 얘기를 안했다. 그래서 드디어 정의를 시작한다. 리만의 제타함수란 바로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이는 약간 불완전한데, 제대로 된 정의는 좀더 기다려야 한다)

1보다 큰 실수 s에 대하여, 위의 급수는 수렴하고 따라서 리만의 제타함수는 실수값을 준다. s=1인 경우는 조화급수라 하여,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발산하게 된다.

따라서

라고 말할 수 있다. 리만의 제타함수는 소수의 분포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제 그 의미를 조금 밝혀보려 한다. 위의 사실은 리만의 제타함수를 통해 소수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다는 첫번째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으로부터 소수는 무한히 많다는 사실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는 소수는 무한히 많다는 2000년전에 나온 증명을 보았는데, 오늘은 리만의 제타함수를 통한 증명을 소개한다.

다음 식은 모든 자연수가 유일하게 소인수분해된다는 사실의 또다른 표현이다.

이를 간략하게 표현하면,

라고 할 수 있는데, 수식의 오른쪽에 있는 기호는 모든 소수 p 에 대하여 들을 모두 곱한다는 것이다. (무한등비급수의 합을 구하는 공식이 사용되었다.)

로그의 성질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곱셈을 덧셈으로 바꿔준다는 것이다. 이를 이용하면,

이제 로그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으로, 미적분학을 배우고 난 다음에 외워두면 매우 유용한 사실은 x가 충분히 작을 때,

라는 것이다.

이를 이용하면,

이 때, s가 1에 가까워지면, 좌변은 무한히 커지게 된다. 따라서, 오른쪽에 있는 합도 무한히 커져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이다. 이는 소수의 역수를 모두 더하면, 무한대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수는 무한히 많을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좀더 수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리만제타함수가 1에서 pole을 갖는다는 것은, 소수가 무한히 많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산적인 자연수의 세계를 탐구하는데, 연속적인 미적분학의 도구들이 투입되는 이 마법같은 이야기.

나는 지금의 이야기들을 대학입시를 마친 후의 겨울방학 때, 한 지방의 대학도서관에서 수학책들을 탐색하다가 발견했던 한 정수론 책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이 때는 이것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무언가 멋진 것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래서 아직도 수학공부를 하고 있다…

위의 증명에서 대충 얼버무린 부분이 있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논의로 메울 수 있다.

AGM을 이용한 파이 계산 알고리즘

다음과 같은 초기값과 점화식을 정의한다.

piagm.JPG

여기에는 덧셈, 곱셈, 나눗셈, 제곱근 연산만 사용된다.

수열 은 파이로 수렴하게 된다. 다음은 다섯번째 항까지 계산한 결과.





한번씩 계산할 때마다, 대략 두 배 정도 정확한 자리수를 준다. 9번째까지 계산한다면, 1000자리 이상의 파이값을 계산하게 된다. 이 알고리즘은 Pi and the AGM 이라는 책에 잘 나와 있다. (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몇개 연습문제의 산들을 넘어야 한다 ㅎㅎ)

이러한 흘러간 시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수학을 볼때면, 마치 개발시대를 지나며 잃어버린 옛 정취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요즘 학생들이야 온갖 추상적이고 현란한 용어가 난무하는 현대수학의 언어와 도구들을 익히는데 온 힘을 써야하는 것이 현실이지만, 내가 보기에 이런 옛스런 수학은 수학에서도 일종의 교양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교양이란게 뭔 필요냐 싶지만, 교양이 없으면, 근본이 되어 있지 않은, 지나가는 바람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잡것이 되기 쉽상이다. 내 생각으로는 학부에서의 수학교육은 이러한 교양에 해당하는 필수적인 옛수학에서부터 추상적인 현대수학까지 다리를 놓아 주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때, 나는 학부때 해석학을 참 개똥같이 배웠구나 싶다.

Abel, Niels H. (1802 - 1829)
[A reply to a question about how he got his expertise:]
“By studying the masters and not their pupils.”

영웅숭배론 - 토마스 칼라일

인도와도 바꾸지 않을 셰익스피어. 이 말은 어디에서 왔는가? 바로 이 책, 토마스 칼라일의 영웅숭배론(On Heroes, Hero-Worship and the Heroic in HIstory)이다.

만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 잉글랜드인을 보고 인도와 셰익스피어 둘 중 어느 것을 포기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인도를 전혀 갖지 못한 경우와 셰익스피어 같은 인물을 전혀 갖지 못한 경우 둘 줄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은 정말 쉽지 않은 물음입니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의심할 나위 없이 공식적인 말로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도야 있든 없든 상관없으나, 셰익스피어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입니다!

어쨌든 인도 제국은 언젠가는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한 민족이 그 자신을 표현할 소리를 얻는다는 것, 그의 가슴이 말하려는 것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해주는 인물을 갖는다는 것은 실로 위대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경우, 저 불쌍한 이탈리아는 지금 분열되고 분리되어, 어떤 대외관계에도 하나의 통일국가로서 나서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 고귀한 이탈리아는 사실 ‘하나’입니다. 이탈리아는 단테를 낳았습니다. 이탈리아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 전역을 지배하는 황제, 그는 강합니다. 많은 총검, 카자크 병사, 대포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큰 땅덩어리를 정치적으로 결속하는 어려운 일을 능히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아직 말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위대한 무엇을 가지고는 있으나, 아직 벙어리 상태입니다. 그는 모든 인간과 시대에 들릴 만한 천재의 소리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러시아는 말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는 아직까지는 거대한 벙어리 괴물입니다. 그의 대포도, 카자크 병사도 모두 녹슬도 없어질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단테의 음성은 아직도 들려옵니다. 단테 같은 인물이 있는 이탈리아는 아직 벙어리 상태인 러시아가 흉내 내지 못할 정도로 결속되어 있습니다. (189-191p)

침착함과 차분한 말로 사람의 뇌에 충격을 가하는 책이 있다면, 열정적이면서도 격정적인 말로써 사람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책이 있다고 할까? 그렇다면 이 책은 바로 후자에 해당한다. 곳곳마다 명언과 명구가 넘쳐나고 있는데, 이 책을 가지고 어휘 빈도 분석을 한다면, 아마도 다음의 단어들이 영웅의 자질을 묘사하는 말들 중 상위에 오를 것이다.

거친, 참된, 깊은,

단순, 간결, 소박,

솔직, 진실, 성실,

순수, 진지, 용기

책을 읽지 않고는 참맛을 느끼기가 어려운데, 맛배기로 조금만 보여줄까 한다.

다음은 ‘시인으로 나타난 영웅’ 에서 단테의 이야기를 하던 중.

그것은 근본적으로 모든 시 중에서도 ‘가장 성실한’것입니다. 성실은 이곳에서도 가치의 척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시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세대를 통해 깊숙이 우리들의 가슴속으로 스며듭니다. 베로나의 시민들은 그와 거리에서 만날 때 다음과 같은 말을 예사로 하였습니다. “보라, 저기 지옥에 다녀온 사람이 있다!” 아, 과연 그러했습니다. 그는 지옥에 다녀왔습니다. 오랜 세월 엄혹한 비애와 고투의 지옥 속에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인물은 모두 그러했습니다. 그의 신성한 코미디는 다른 방도로는 완성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상이나, 어떤 종류이든 진실한 노작, 또는 최고의 덕, 이런 것들은 모두 고통의 산물이 아닙니까? 말하자면 암흑의 회오리바람에서 탄생한, 자유를 얻으려고 몸부림치는 포로의 노력과 같은 참된 노력, 그것이 바로 사상입니다. 모든 의미에서 우리는 ‘고난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160p)

다음은 ‘성직자로 나타난 영웅’ 장에서 루터의 이야기를 시작하며 하는 이야기.

영웅숭배? 아, 사람이 자립적이고 독창적이고 진실하면서 다른 사람의 진실성을 존경하고 믿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다른 사람의 죽은 형식, 와전, 허위를 믿지 않게끔 필연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강제할 뿐입니다. 사람은 그의 열린 눈으로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의 눈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

사람이 자기에게 진실을 가르쳐주신 이를 사랑하기 전에 어찌 눈을 감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만이 그를 암흑 속에서 광명 속으로 구해주신 영웅적 스승을 진정한 감사와 참된 충성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존경을 받아 마땅한 진정한 영웅이며, 악마의 정복자가 아닙니까? 검은 괴물,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유일한 적인 ‘거짓’은 그의 용기에 정복되어 쓰러져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세상을 정복해준 것은 그 사람입니다!

영웅숭배는 결코 사멸하지 않습니다. 사멸할 수 없습니다. 충성과 주권은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합니다. 그것들은 허식과 외관이 아니라, 실제와 성실 위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눈, 우리의 ‘개인적 판단’을 닫음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열고 무엇인가를 바라봄으로써 말입니다! 루터의 사명은 모든 거짓 교황과 거짓 왕을 타도하고, 새로운 진정한 교황과 진정한 왕에게 생명과 힘을 먼 곳에서나마 가져다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성실치 않은 인간들을 가지고 공동체를 형성할 수는 없습니다. 수직과 수평을 맞추어 서로 직각이 되게 하지 않고서는 건축물을 세울 수 없습니다! 프로테스탄티즘 이래의 이 모든 험난한 혁명적 사업에서 나는 가장 충복된 결과가 예비되고 있음을 봅니다. 즉 영웅숭배의 근절이 아니라, 오히려 온통 영웅들로 가득 찬 세계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 준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영웅이 ‘성실한 사람’을 의미한다면, 우리 모두가 영웅이 되어서는 안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전적으로 성실한 세계, 신앙의 세계, 그러한 세계는 과거에 있었으며, 미래에도 있을 것입니다. 없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올바른 종류의 영웅숭배입니다. 모든 사람이 진실하고 선한 곳에서만 진실로 더 선한 인물이 제대로 숭배를 받습니다!… (211~212p)

책을 읽고 나니, 나도 나만의 영웅들을 뽑아서 오로지 찬사만으로 가득찬 책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치는데, 나는 이과라서…OTL…

수학과 대학원생이 되면 좋은점 - 라마누잔 이야기

대학에 들어간 첫해, 기숙사 방에 앉아 ‘수학이 나를 불렀다‘라는 인도수학자 라마누잔에 대한 이야기를 읽던 때가 새삼 떠오른다.

1913년, 인도에서 대학교육도 받지 않고 독학으로 수학을 공부한 라마누잔은 영국에 있던 당대 최고의 수학자 하디에게 자신이 발견한 수학적 결과들에 대한 검토를 부탁한다.

Dear Sir

I beg to introduce myself to you as a clerk in the Accounts Department of the Port Trust Office at Madras on a salary of £ 20 per annum. I am no about 23 years of age. I have had no university education but I have undergone the ordinary school. I have been employing the spare time at my disposal to work at Mathematics. I have not toddle through the conventional regular course, but I am striking out a new path for my self. I have made a special investigation of divergent series in general and the results I get are termed by the local mathematicians as “Startling”

I would request you to go through the enclosed papers. Being poor, if you are convinced that there is anything of value I would like to have my theorems to be published. I have not given te actual investigation nor expressions that I get but I have indicated the lines on which I proceed.

Being inexperienced I would very highly value any advice you give me. Requesting to be excused for the trouble I give you.

I remain
Dear Sir
Your truly
S.Ramanujan

편지에 담긴 결과 중에는 하디를 완전히 매료시킨 결과가 있었으니… 하디는 이를 두고 이러한 평을 남겼다.

나를 완전히 패배시킨 정리다. 예전에 그에 조금이라도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없다. 한눈에도 최고의 경지에 오른 수학자만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참인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만약 정리가 참이 아니라면, 이러한 정리를 생각해 낼 수 있을만큼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theorems] defeated me completely. I had never seen anything in the least like them before. A single look at them is enough to show that they could only be written down by a mathematician of the highest class. They must be true because, if they were not true, no one would have the imagination to invent them.”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결과 중의 하나가 바로 다음 식이다.

??? @.@ ??? 어릴적엔 그저 동화속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러나,,

어제 오후부터 이 식을 공부했는데, Rogers-Ramanujan identity 만 받아들인다면, 모든 과정들을 다 점검한 듯 하다. 하나하나의 과정마다, 위대한 장인의 숨결이 느껴진다. 여기까지 오는 것도 참 오래도 걸렸다. 나는 오일러-자코비-라마누잔 가문의 수학을 숭배한다.

수학과 대학원생이 되면 좋은 점은, 이러한 동화책의 그저 놀랍기만 하던 이야기 속 수식들을, 진짜로 자기 머리를 써서 이해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학부생 때는 혼자서 찾아가며 공부하기는 조금 힘들것 같아서, 대학원이라 했다. 누군가 효율적으로 끌어주면 할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이러한 경험을 할 때, 나는 수학을 공부하는 보람을 느낀다.

저 식을 진짜로 한번 이해하고 싶은 분?

연극 ‘프루프’와 내쉬?

악어컴퍼니라는 곳에서 올려놓은 연극소개는 다음과 같다.

이 연극을 소개하는 뉴스마다 내쉬를 언급하길래 왜 그런가 찾아보니, 연극을 제작한 곳에서 나온 설명 때문인 것 같다.

이 연극은 이미 영화로 만들어져 있고, 기네스 팰트로가 주연을 한 바 있다. 내가 영화에서 본 바로 기억을 하자면, 존 내쉬는 이야기와 전혀 상관이 없다. 여주인공의 수학자 아버지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약간 있다는 점 단 하나만 빼고 말이다. 여기선 아버지가 죽는 것으로 나오고, 그 배경은 시카고 대학인데, 도대체 왜 여기다가 살아있는 프린스턴의 내쉬를 갖다 붙이는 것일까? 이걸 내쉬를 ‘모티브’로 삼았다고 말할 수 있는거야? 뭔가 한국측 제작사의 실수가 있는 것 같은데…이유를 아시는분?

그나저나 대중문화 속의 수학자는 왜 다 미친 상태로 묘사될까? 수학을 못하던 문과출신 글쟁이들에겐 수학은 미쳐야만 할 수 있는 환상속의 무언가로 보이는 것일까?

다음중 무엇이 제일 ‘민주적’인가?

선거는 민주적인가‘라는 책을 다시 읽고 있다. 2004년 말에 읽었었는데, 그 때도 이렇게 재밌게 읽었는지 잘 기억이 안난다. (그 때는 그러니까 탄핵이후 과반의석을 얻은 열린우리당 하는 꼴에 하도 분통이 터져서 직접 당 안으로 뛰어들어가려 준비하던 때였다)

책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지금의 우리는 선거제도가 없는 민주주의를 상상하기 어렵다. 시민들이 대표자를 택할 권리라는 면에서 보통선거권은 선거제도가 민주적이라는데 근거를 부여한다. 그런데 실제로 시민들이 그들의 대표자가 될 수 있는지를 고려할 때도, 선거는 민주적인가? (그네 공주를 보면 …) 근대 이전의 유럽에는 추첨의 전통도 있었다 하고, 조선은 정치인의 등용에 과거 제도를 사용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설문조사!

다음중 무엇이 제일 ‘민주적’인가?

  1. 추첨
  2. 선거
  3. 시험

미국은 어떻게 여소야대의 문제를 해결하는가?

나는 기본적으로 새로운 정당의 모델을 만드는 일에 관심이 있다. 지난 촛불시위를 보며, 이런 사회에서 정당은 어떤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무슨 역할을 할 것이며, 어떻게 이러한 역동적인 사회적 에너지를 제도화 해 나갈 수 있을지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가끔은 그냥 ‘다음 아고라’가 새로운 형태의 정당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2% 부족한 무언가가 있다.

그런데 정당의 모델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그 문제만 생각하고 있을수만은 없는 일이다. 정당이 생존하고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한 배경, 즉 정치문화, 선거제도, 정당체계 그리고 이들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정당생태계같은 모든 것들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종자를 가져왔다고 한들, 잘못된 땅에 심으면 결국은 그냥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성공할 수 있는 정당을 만들고 싶은 것이고, 이것이 내가 정치제도에 관심을 갖는 주된 이유이다. 개헌 얘기를 언급하는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이루어진다. 아무튼 정치제도의 디자인을 고민하는 일에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했으면 하는 바램에서 앞으로는 종종 이러한 주제의 글들을 올려 보고자 한다.

오늘의 주제는 제목에서 말하듯이 ‘미국은 어떻게 여소야대의 문제를 해결하는가?’이다. 나는 사실 대통령제가 그다지 논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통령과 의회의 권력 충돌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말로는 이를 권력의 분산 분립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절대절명의 명제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제 이외의 제도들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영국을 대표로 하는 의원내각제는 권력의 융합을 특징으로 한다. 독자적으로 또는 연립을 통해 의회 내 과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행정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분권형대통령제 또는 이원정부제라고 칭해지는 프랑스의 경우는 흔히 대통령과 총리가 권력을 나누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대통령과 의회의 다수정파가 같은 정당이라면 매우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가 되고, 반대로 대통령과 의회다수의 정당이 다를 경우, 대통령은 실질적인 통치권한을 총리에게 넘겨 사실상 내각제형태로 운영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언급한 제도들의 경우에는 입법 권력과 행정 권력이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소야대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sonnet이란 분은 ‘An Election Too Far’라는 좋은 글에서 “대통령의 권력은 설득하는 권력(power to persuade)이다.” 라는 문구를 인용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의 대통령에게는 적합할지 몰라도, 한국의 대통령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말일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과 미국의 정당은 아주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당들은 강한 당론을 갖는다. 당 총재 및 원내대표의 지휘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과연 이런 상태에서 설득하는 대통령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각 당 지도자와의 대화가 될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아무리 대화를 원해도 그네 공주가 ‘참 나쁜 대통령!’ 이러면 OTL…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에서 ‘니는 신자유주의자! 말안해!’ 이러면 또 OTL… 여소야대 상황에서는 완전히 독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제목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한 답을 적어볼까 한다. 강원택 교수의 ‘대통령제, 내각제와 이원정부제‘에서 옮긴다.

미국에서는 어떤 이유로 분점정부, 곧 여소야대의 문제가 심각한 정치적 갈등으로 비화되지 않고 해결되어 왔을까?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미국은 가장 대표적으로 약한 정당조직을 갖는 국가이다. 당의 기율이 약하기 때문에 개별 의원들에 대한 정당의 통제는 매우 제한적이다. 미국의 정당은 실질적 권한을 행사하는 당의 지도자나 상설화되어 활동하는 중앙당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의원들은 당의 통제나 지시로부터 자유롭고 매우 큰 자율성과 독자성을 갖고 있다. 미국에서 의원들의 자율성과 독자성이 이처럼 강한 것은 무엇보다 선거에서 정당의 역할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정치는 정당 간 이념이나 정책의 차별성이 유럽 국가들과 비교할 때 크지 않기 때문에 정당보다는 후보자 중심으로 선거운동이 행해진다. 더욱이 후보자의 선정이나 정치자금의 마련도 예비 선거나 개인 후원회와 같이 당보다는 후보자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정당조직에 대한 의존도는 낮을 수밖에 없다. 즉 공천과 자금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속박에서 벗어나 있으며, 선거운동 역시 정당보다는 지역구 관리나 개인적 인기 등 후보자의 개인적 요소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한편 미국 의회에서는 정당의 당론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호명 투표를 행하기 때문에 개별 의원의 투표결과가 그대로 유권자들에게 공개된다. 따라서 대통령과 동일한 정당 소속이라고 해도 지역구의 이해관계와 배치되는 법안에 찬성표를 던지게 되는 경우에는 차기 선거에서 매우 불리한 입장에 놓일 수 있다. 백창재의 지적대로 미국 정당들은 조직적 취약성을 지니고 있고 이념이나 정책적 단합도가 약하기 때문에 양당 간의 대립이 곧바로 분점정부 하에서 정통성을 가진 두 기구 간의 갈등으로 악화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이번에 미국의 민주당 후보 경선이 끝나자 힐러리가 오바마에게 “빚좀 어떻게 해결좀 해주면 안될까…”하는 장면들을 보았을 것이다. 철저하게 개인들이 중심이 된 싸움이었다는 얘기다. 미국식당에서는 웨이터도 팁을 찾아 각자 경쟁하듯이, 미국은 정당도 그렇게 움직이는 면이 있다는 얘기다. 이렇게 모든 것들이 자신들이 택한 가치과 원리 위에서 철저하게 구현된 나라가 미국인 것이다. ㄷㄷㄷ 무섭죠? 아무튼 이러한 정당문화 하에서라면, 설득하는 대통령이 추구할 수 있는 그냥 지나가는 덕담이 아닐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정치제도를 이해할 때는 여러 측면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대통령제라는 하나의 제도만 살필 것이 아니라, 그 하부구조에 존재하고 있는 정당문화도 함께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론이 강한 정당문화를 갖는 우리의 경우에는 선거주기를 일치시킨다던가, (좋은 해결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예를 들자면) 연정같은 것을 허용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도 해결 방안으로 고민해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런 모든 조건들에서도 잘 생존할 수 있는 정당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참 어렵겠죠? 아 머나먼 정당개혁의 길이여…

다가오는 개헌의 그림자

심대평 총리설이 나돌고, 여기에 친박연대도 슬슬 한나라당으로 기어들어올 채비를 하는 것 같다. 시민들은 그간의 촛불시위의 결과로 쩔쩔 매고 있는 정부를 보며, 승리감을 맛보고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펼쳐지고 있는 현실은 200석에 육박하는 보수의 연합이다. 촛불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지만은, 시민사회의 모든 역량을 결집해야 하는 순간은 선거 때라는 것을 이번 일을 통해서 꼭 배우고 지나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200석에 육박하는 보수연대가 탄생될 경우, 적어도 힘으로는 못할 일이 없다. 개헌까지도 독자적으로 밀고갈 수 있는 수준이 된다. 이것을 개헌을 위한 포석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일까? 아무튼 나는 바로 그 개헌 얘기를 조금 해 보려 한다.

2007년 1월에 노대통령이 개헌을 제안했을 때, 경제가 어려운데 무슨놈의 개헌이냐며 난리치던 조중동과 그에 부화뇌동한 정치꾼들이 있어, 개헌론은 채 얼마 못가 그대로 수면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그러나 지난 2008년 5월 28일, 중앙일보는 사설로 개헌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사설] 18대 국회가 해야 할 일 ① ‘개헌’ 공론화 하자)

단임제는 대통령이 집권 과정에서만 평가받고 정작 대통령이 된 뒤엔 실적으로 평가할 방법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헌법 구조다. 임기 중반 이후 역대 대통령들이 종종 보였던 무책임성은 여기서 나온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세종대왕같이 훌륭한 대통령이 나오더라도 임기 이후인 5년 뒤 미래를 설계하기 쉽지 않다. 단임제의 비전 부재적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정치학자는 이런 단임제 권력구조에선 현직 대통령과 차기 예비 대권주자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지금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갈등도 현재권력과 미래권력의 필연적 분리를 가져오는 헌법의 문제점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대통령 단임제로 운영되는 나라는 한국 말고는 멕시코의 7년 단임제밖에 없다.

국회의원과 지방정부의 임기는 4년인데 대통령 임기는 5년이기에 나타나는 임기 불일치 현상은 숱한 국력 소모를 가져왔다. 2006년 지방선거→2007년 대선→2008년 총선처럼 매년 전국 선거를 치르는 일이 다반사다. 선거는 시민의 축제이기도 하지만 일말의 포퓰리즘 속성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대통령의 임기를 4년으로 조정해 3대 동시선거로 가든, 대선 2년 뒤 총선을 치르는 중간평가 선거로 가든 변화가 필요하다.

권력구조 개편은 미국과 같은 4년 중임제의 정통 대통령제, 독일·일본 같은 총리 중심의 내각책임제, 프랑스 같은 분권형 대통령제의 다양한 논의가 있을 수 있다. 프랑스형의 분권적 대통령제는 대통령은 국민이 뽑고, 총리는 국회의 다수당 대표가 선출되는 방식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중 나름대로 연구 끝에 분권형과 비슷한 제도를 선호했다. 이 밖에 개헌 논의의 대상엔 지방 분권을 강화하거나 미래 과학의 진전에 따른 생명권의 규정 같은 철학적 문제도 다수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읽어보면 참으로 논리정연한 사설이다. 개헌을 꼭 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내가 불만인 것은, 2007년초와 비교하면 경제는 지금이 훨씬 더 위기 상황이라고 볼 수 있는데, 왜 지금은 되는 건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과 국회의원 선거의 주기를 일치시키는 것은 지난번이 좋았지, 다음 번이 더 좋지가 않다. 이를 위해서는 이메가의 임기를 줄여야 한다. (생각해 보니, 그 때쯤 되면 가능할 것도 같다) 아무튼 이렇게 자신들의 입장을 쉽게 뒤집는 언론들을 어떻게 신뢰해야 할지 모르겠고, 이렇게 신의가 없는 한국정치는 정말 역겹다고 할 수 밖에. 국민들만 낚인 것이다. 개헌은 애초에 경제와 크게 상관이 없는 일이었으니…

개헌이 화제가 된다면 아무래도 권력구조의 개편이 다시 큰 이슈가 될 것이다. 내각제를 하자, 분권형 대통령제를 하자는 주장도 있을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역사의 경험들을 존중하고, 혼란을 막는 시행착오를 줄이는 차원에서, 대통령제를 유지하며, 여기에다가 우리의 현실인 다당구도를 어떻게 무난하게 결합시킬 것인가를 열심히 생각해야 한다는 쪽인데,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차차 써나가도록 하겠다. 이런 나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딴나라당은 아무래도 내각제를 원할것 같다. 이번 미친소 정국 같은 경우라면 이메가를 자르고, 다른 사람 앉히고, 불만이 많으면 또 짜르고 새로 앉히고, 아주 간절히 원하지 않겠는가? 4,5년씩 기다릴게 아니라, 줄 쫙 서 있으니 돌아가면 사이좋게 해 먹자는 생각일게다.

이러한 권력구조의 개편말고, 많은 생각이 필요한 부분 하나가 위에 굵은 글씨로 표시한 ‘지방 분권’이다. 2주전 CNB저널은 “18대 국회, 州정부 개헌론 순풍“이라는 기사를 커버스토리로 다룬바가 있다.

이명박 정부의 개헌의 틀은 우선 지방분권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이와 관련, 미국식 연방정부안을 택할 공산이 크다는 여론이다. 지방분권형 개헌에는 미국 연방정부처럼 각 주에 모든 권한을 주고 스스로 주를 운영하는 방안이다. 이에 따라 각 주는 행정 및 입법·사법 권한을 주는 대신에, 주 정부가 행정력을 잘못해 재정자립도가 떨어질 경우 중앙 정부가 주 정부로부터 권한을 인수해 직접 운영하는 방안인 ‘관리대상 정부’로 선정, 워크아웃제를 도입하는 방안이다. 이에 따라 중앙 정부는 주 지사를 중앙 정부에서 파견해 다음 지방선거까지 주 정부를 총괄하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이번에 한국에 갔을때, 구해온 책 중 하나가 바로 동아시아연구원에서 작년에 출판한’분권헌법‘이라는 것인데, 이 책에서는 연방정부형 모델, 광역정부형 모델, 지방자치강화형 모델이라는 세 가지 모델의 개헌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지방 분권 개헌에 대해서도, 앞으로 차차 다뤄볼 생각이지만, 이게 처음 들으면 상당히 솔깃한 측면이 있다. 미래를 생각하면 바람직하다는 명분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읽고 나서 시간이 지날수록 좀 불안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온다. 아무튼 아직 나의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고, 입장도 정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단순한 권력구조 개편보다도 훨씬 더 근본적인 수술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해 좀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정도의 얘기를 하고 싶다.

사회투자국가

새 정당을 만들면, 무엇으로 내용을 채워가야 할지 많은 고민이 필요한데,<사회투자국가라는 개념은 이제 그 후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조금씩 공부를 해보고 있다. 너무 단순화하는 것은 위험하겠지만, 일단 큰 그림으로 대충 이해한 바를 말하자면, 전통적 복지 국가가 소득보장과 같은 결과의 평등에 방점이 찍혀있다면, 사회투자국가는 아동정책과 같은 기회의 평등을 좀 더 중시하는 복지 국가 모델로 보인다. 우리처럼 보수담론이 절대적으로 강한 나라에서는, 일단 사회투자국가를 디딤돌로 삼아서 복지정책을 향해 한발씩 더 나아가는 것이 점진적인 개혁의 길일 것 같은데, 과연 이것이 영세자영업자라던가 양극화 같은 심각하게 당면하는 문제들을 얼마나 해결할 수 있느냐가 제기되는 문제의 핵심일 것 같다. 물론 이것은 포스트 이메가 시대를 위한 얘기들이다. 아무리 시대가 절망적이라고 해도, 누군가는 또 준비를 해야하는 거니깐...

참고자료들을 여기 여럿 모아 놨으니, 함께 공부를 해 보아요~ 맨 아래에 있는 두 개의 논문은 아주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정치권에서도 이런 레벨로 좀 싸우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이 수준까지 끌어올리려면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더 걸려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당장은 정당도 없으니...



영국을 통해 읽는 사회투자국가의 이론과 현실 (http://www.vop.co.kr/plus/2007/07/26/A00000080665.html)

임채원 / 서울대 행정연구소 연구원

1997년에 블레어가 18년 동안의 영국 보수당을 대신하여 신노동당(New labour)으로서 집권을 하게 된다. 새로운 환경에서 영국 노동당은 구좌파와 대비되는 새로운 환경에 적합한 노동당 정치노선과 정책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에 기든스는 다음해인 1998년에 ‘제3의 길’을 제시하게 된다. 블레어 정부의 청사진은 1994년 사회정의위원회의 보고서, 1998년의 기든스의 제3의 길, 1998년의 녹서(Green Paper)가 근간이 되었다.

영국 노동당의 공공정책연구소(IPPR)는 94년 보고서가 발간된 10년 후인 2005년에 블레어 정책을 평가하는 같은 이름의 보고서를 발간한다. 사회투자국가론은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구좌파와 신우파를 극복하려는 제3의 길이기도 하지만 이를 세계적 관점에서 본다면 미국식 시장주의와 북구식 사회정책을 결합하려는 시도들이다. 특히 북구의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을 도입하여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국가모델이다.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2-21

아동에 대한 사회투자, 아동정책 (http://www.knowhow.or.kr/oi/PDF/2-21.pdf)


참여정부 국정운영백서 경제

1편 참여정부 경제정책 종합평가

2장 사회투자국가의 기반 구축
(http://www.knowhow.or.kr/oi/PDF2/3/3_1(14-63).pdf )


사회투자국가가 우리의 대안인가? dbpia0837726.pdf

-최근 한국의 사회투자국가 논의와 그 문제점

김영순(Kim Yeong-Soon) 저

초 록 : 이 글은 최근 한국의 사회투자국가 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왜 사회투자 국가가 우리의 대안적 복지모델에 될 수 없는지 논한다. 최근 한국의 사회투자 국가론은 두 가지의 경로를 통해 제기되고 있다. 하나는 이른바 ‘새로운 사회적 위험’에 대한 기능적 대응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차자원에서 사회투자적 복지 ‘정책’의 강화를 주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식 제3의 길의 복지모델로 제기된 사회투자 ‘국가’를 우리의 대안적 복지모델로 수용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이 글에서는 한국에서 사회투자정책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사회투자국가를 우리의 대안적 복지모델로 상정하고 그 담론을 유포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으며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영국의 경험이 보여주듯 빈곤과 불평등을 시정하기 어려운 잔여적 복지국가의 최신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적 지형에서 이 사회투자국가론은 복지담론에서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고 보편적 제도적 복지국가를 ‘소비적’ 복지국가로 매도함으로써 한국의 국가복지 발전에 장애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 이중의 사회적 위험에 직면한 한국에 필요한 것은 사회투자국가의 건설이 아니라 소득보장과 보편적 사회서비스체계의 확립을 통해 복지국가를 내실화하는 것이다


사회투자국가가 우리의 대안이다 dbpia0875020.pdf

-사회투자국가 비판론에 대한 반비판

양재진(Yang Jae-Jin) 저

초 록: 이 글은 김영순 교수가 《경제와사회》 2007년 여름호(통권 제47호)에 게재한 사회투자국가에 대한 비판논문에 대한 반론문이다, 본 반론글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투자국가를 지향하는 영국 노동당 정부의 사회투자정책은 김영순 교수의 주장과 달리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둘째, 사회투자국가의 사회투자정책은 복지지출의 축소 수단이 아니다. 영국의 경우, 전체 사회지출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셋째, 사회투자국가담론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해 친복지담론을 약화시키기보다는, 영국에서 보듯이 국민적 지지 속에 친복지담론의 형성에 도움을 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결론에서는 김영순 교수가 대안으로 제시한 ‘적극적 복지국가’와 사회투자국가는 프로그램의 구성상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사회투자국가 건설에서 보완적으로 함께 추진해야 할 사항들에 대해 논한다.


한국사회복지학회 2007년도 사회투자정책 심포지움, 2007. 2 (DBPIA)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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